2009. 9. 10. 14:15 ▶ nomad/'09 Japan: Tokyo
올 봄, 잠시 동안의 도쿄 생활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절한 날씨에, 내 평생 다시 살 일 없을 월13만엔짜리 맨션에,
일본의 비싼 교통비 따위 무시할 수 있는 1일도보생활권까지.
놀러간 게 아니라서 많은 경험을 하진 못했지만 그 나름대로 소박하게 즐거웠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이곳.. 차차카페.
서울에서도 일주일에 5일은 카페에 가는 내게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첫날, 짐 정리를 끝낸 뒤 필요한 물건도 사고 주변도 익혀놓을 겸 동네산보를 나갔는데..
상점가의 귀퉁이에 자리잡은 차차를 보는 순간- 당분간 내 아지트는 이곳이 되겠다고 예감했다.





동네 사람이 아닌 이상 절대 갈 수 없는 곳에 있다보니 처음엔 장사가 될까 싶었다.
그러나 10개 뿐인 의자가 꽉 차는 일은 없어도 한두명씩 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장 보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찾는 아줌마도 있고
퇴근 길에 들러 유일한 알콜인 병맥주를 가볍게 마시고 가는 샐러리맨도 있고.
그렇다고 동네 사랑방같은 시끌시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고.. 내내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다.

차차가
좋은 점은 일단 깨끗하다는 것. 전체적인 인테리어나 소품들이 편안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을 준다.
특히 화장실을 보면 놀라게 되는데 코딱지만한 가게 크기에 비하면 어찌나 넓은지..
화장실에 있는 소품들이나 핸드워시도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게 감각적이다.





이곳의 커피 중 나는 항상 차차블렌드를 고집했는데 살짝 진하고 독특한 향이 좋았다.
커피 종류 외에도 일본차나 홍차도 있고 그때그때마다 다른 식사 메뉴와 디저트류도 있다.
위의 사진은 잠시 친구와 동생이 놀러왔을 때 데려가서 먹은 것으로 하야시라이스, 핫도그,
그리고 저건.. 서비스로 주신 게 저거였나. 머쉬멜로가 들어 있었는데 저게 아닌가.
뭐 암튼 하도 여러 개를 시켜서 기억은 잘 안나지만 분명한 사실은 가격 대비 훌륭했다는 것.


사실 차차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바로 주인 아저씨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런 종류의 일본 카페에 대한 로망을 이뤄준 분이라고나 할까..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음료와 요깃거리가 있고, 단골이 아지트삼아 항상 들락거리고,
가게 전체에 주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일종의 喫茶店(킷사텐)에 대한 로망이 생긴다.
차차는 굳이 말하자면 카페의 분위기가 조금 더 강하지만. 어찌됐든 내 로망을 이뤄주기엔 충분했다.

홀로 차차를 운영하는 아저씨는 일본 배우 코히나타 후미요小日向文世와 아주 아주 살짝 비슷한 느낌.
라틴음악과 재즈가 흐르는 차차만의 분위기도 전적으로 아저씨 취향이다.
단골들은 거의 그냥 마스터라고 부르는데 (그렇다. 이 호칭마저도 내겐 로망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드라마에서 보던 바로 그것이었다.
한번은 저녁 무렵 바에 앉아 아저씨랑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시계를 보곤 식겁하더니
"아이고, 여기 오면 이렇다니까. '마스터 매직'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몰라" 하면서 웃었다.

아저씨가 좋아진 건 두번째 방문 때였다. 들어서며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하시는 말.
"지난 번에 드셨던 걸로 드릴까요?"
고작 두번째인데.. 처음 갔을 때 마셨던 걸 기억해줬다는 자체가 정말 기분좋게 만들었다.
손님 하나하나를 신경쓰고 있다는 느낌은 과연 나쁘지 않았고, 이후 차차에서의 주문은 일정했다.
아저씨가 "항상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라고 하시거나, 내가 "항상 마시는 걸로 주세요" 라고 하거나.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아저씨의 "어서오세요"에도 "아, 오셨네요"의 표정과 뉘앙스가 첨가되었다.
아는 사람은 알 거다. 이 작은 차이가 얼마나 기쁜지..
사실 서울에서도 정말 자주 가는 카페들이 있는데 (거기다 나는 왠만하면 거의 항상 같은 걸 주문한다)
분명 얼굴이 익었을텐데도, 갈 때마다 새로운 손님을 받는양 처음 갔을 때와 다름없는 곳들이 많다.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걸 주문할 때마다 차차의 마스터가 그리워지는 건 당연지사.


도쿄에서의 일정이 끝날 무렵 맨션을 나와 다른 곳으로 옮긴데다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 한마디를 못했다.
덕분에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도쿄행의 첫 번째 방문예정지는 물론 차차 카페다.





내가 항상 고수했던 자리.
그리워진다. 다시 갔을 때에도 모든 게 변함없길..


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