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5. 00:31 ▶ nomad/'11 Turkey

교회를 나온 뒤에도 쉬이 가시지 않는 평화로운 기분에 젖어 관광객은커녕 현지인 코빼기도 볼 수 없는 골목 골목을 느긋하게 돌아다닐 때였다. 낮잠 시간인 건지 시내에 뭔 일이라도 났는지, 도대체가 사람 한 명을 볼 수 없어 조금 심심하던 차에 저 멀리 공놀이를 하는 꼬맹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날 발견한 녀석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와 뽀또 뽀또 난리다. 뽀또? 사진? 큼지막한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지들끼리 와구와구 떠드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웃으면서 카메라를 잡으니 다시 우르르 멀어져 지들끼리 포즈를 잡는다. 원 투 쓰리, 찰칵. 이 사진은 그렇게 찍었다.

 




애들 표정이 밝고 자연스럽다. 초점도 잘 맞았다. 찍고 나니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카메라 액정을 보려고 모여드는데 보자마자 까르르 난리가 났다. 디카보단 폴라로이드가 좋았겠다 싶어 아쉬워하고 있는데 머리 큰 놈들이 외친다. “머니, 머니!”

 

 

..애기야 너 지금 뭐랬냐...?

 

 

순간 너무 어이가 없었다. 살짝 열이 받아 그냥 가려는데 뭐라뭐라 터키말로 떠들며 날 에워싼다. 그러더니 남자애가 이번엔 같이 공놀이를 하자는 듯 공을 튀겨댄다. 받아주면 또 돈 얘기가 나올텐데 싶어 별 반응없이 보고 있자니 녀석이 갑자기 코앞에서 내 쪽으로 공을 뻥 찬다. 헉!

 

내 얼굴 바로 옆으로 비껴가 뒤로 넘어가긴 했지만 정말 놀랐다. 일부러 얼굴을 굳히고 노!하며 짐짓 큰소리를 내니 다른 애들이 남자애한테 달려가 와글와글. 전혀 알아들을 순 없지만 분위기상 돈도 못 받았는데 왜 저 외국인 화나게 하냐 뭐 그런 것 같다. 차라리 내게 몰려들어 돈 달라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기분이 안 좋다.

 

전문 악동들은 아닌지 가려는 내게 매달리지는 않고 다시 뽀또 뽀또 외쳐가며 지들끼리 포즈를 잡는데, 내가 안 찍고 있자 아무 것도 모르는 게 분명한 막내녀석이 쪼물거리다 방싯 웃고는 다른 쪽으로 가버린다. 그 아이를 큰 놈들이 억지로 잡아와 붙잡고 포즈를 시키는데(사진을 보면 저때도 손을 붙잡고 있다) 그걸 가만히 보면서 마음이 참 복잡했다. 그러다 저 멀리 창문이 열리고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큰 소리로 아이들에게 뭔가 얘기하길래 그 틈을 타 자리를 떴다.

 

 

나중에 터키만 3개월 째 여행 중이라는 일본 남자아이를 만났는데 자기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며 오히려 놀라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온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다 이런 일이 생기니 갑자기 동네가 낯설어지고, 혼자 여행와서 내가 너무 안일했나 싶고(전문 악동들이었다면 다 털릴 수도 있었다),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도 다 의심스럽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은 결국 내 기분을 급속도로 추락하게 만들었다.

 

대체 저 녀석들을 모델삼아 돈을 준 건 누군지, 카메라를 보자마자 아동 화보 같은 웃음과 표정을 지을 수 있게 한 건 누군지. 진실과 왜곡을 넘나드는 게 사진이라고, 뒷얘기 없이 보면 꽤나 괜찮은 사진이 그 어떤 사진보다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좀 전까지 성요한교회에서 느꼈던 행복은 개나 준 지 오래였다.

 

 

 

동네 산보 따위는 관두고 터벅터벅 패잔병처럼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든 아래 쪽으로 내려가면 큰 길이 나온다는 걸 파악했기에 무턱대고 걸었는데 나와보니 조금 헷갈렸다. 얻어온 지도를 보며 방향을 가늠하는데, 전체적인 그림 상으로는 맞는 것 같으면서도 길 표시가 애매하다.

 

둘러보니 행인은 없고 말을 걸 만한 사람은 남루한 행색의 구두닦이 아저씨 뿐. 구두닦이라고 다 그런 게 아닌데 이 아저씨는 정말 남루했다. 근데 그게 가난해서 남루한 느낌이 아니라 약간.. 노숙하는 기인 같은 느낌. 어쨌든 터키말을 모르니 별 수 없이 영어로 물어봤다.

 

“저기, 여기가 여기 맞아요?”

 

지도를 가리키며 묻는데 이 아저씨 답변이 유창하다. 아니 실은 그것보다 분위기가 밝았다. 크게 웃는다면 ‘껄껄껄’ 할 것 같은 느낌. 친절한 것과는 좀 다르다. 슬리퍼를 신고 있어 닦을 것도 없는 내게 유쾌하게 이것저것 말을 걸어 온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애들 때문에 우울해진 기분을 풀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문득 생각나 터키어로 ‘고맙습니다’가 뭐냐고 물어봤다. 이거 한 마디는 알아야 될 것 같아서. 가이드북에 써있지만 역시 본토 발음은 다르다. 수차례 발음하고 교정 받으며 길바닥 회화스터디를 했다. 그러면서 어느 새, 내 기분은 다시 상승하고 있었다.

 

별 것 없는 잡담을 하다 슬슬 가야 할 것 같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내게 아저씨가 말한다.

 

“셀축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예요. 좋은 여행이 될 겁니다. 행운을 빌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뭐, 우연한 만남에서 삶의 힌트를 얻는 흔해 빠진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다. 행색은 꾀죄죄하지만 유쾌한 (영어도 잘하는) 거리의 구두닦이 아저씨라니. 아담 샌들러 주연의 <빅대디>에 나오는 스티브 부세미도 아니고. (그 정도로 기인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저씨의 기운 찬 인사에 다시 내 여행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극과 극을 치닫는 경험에 감정기복도 오르락 내리락 조금 정신없긴 했지만, 원래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는 법. 아직 한참 남은 여행을 우울한 기분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아저씨 덕분에 정말 나아진 기분으로 웃으며 제대로 인사했다. Teşekkür ederim!



기념으로 사진 한 장 남겼으면 좋으련만 그땐 찍을 생각을 못했다. 혹시나 싶어 셀축 사진을 뒤지다가 박물관 앞에 자리잡고 있는 아저씨 발견.

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