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5. 00:37 ▶ nomad/'11 Turkey

에페스에 굳이 갈 생각은 없었다. 대단한 유적인 건 알지만 이스탄불에 처박혀 카페놀이라도 할까 했던 내게 딱히 끌리는 곳은 아니었다. 세계문화유적탐사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짧은 일정에 굳이 남들 가는 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까. 에페스에 간 건 전적으로 메멧 때문이었다.

 

우연히 들린 레스토랑의 주인인 메멧은 근방을 지나가는 대부분의 여행자를 알고 있는 마당발로 ‘셀축의 친구’를 자처한다. 여유로운 시간대에 혼자 온 내가 메멧의 타겟이 된 건 당연했다. 식사를 마치고 서비스로 나온 애플티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다가와 묻는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아 한국인~ 셀축은 처음인가요?”

“터키여행이 처음이에요.”

“에페스는 가봤어요?”

 

다이렉트로 에페스부터 묻는 걸 보니 역시 이곳에 오는 외국인들의 필수코스인 모양. 아직 안 가봤다고 하자 당장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오란다. 여기서 에페스까진 보통 2리라 정도를 내고 버스를 타거나 여행사 투어차량을 이용하는데, 자기 식당에선 매일 아침 공짜로 에페스까지 태워준다는 것. 갈 계획은 없었지만 따로 알아보지 않고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면야 괜찮겠다 싶었다. 잠깐 기다리라던 메멧은 안에 들어가더니 한국어로 된 에페스 안내책자를 가지고 온다.

 

“이거 빌려줄게요.”

“그냥 가져가도 되요?”

“내일 올 때 돌려주면 되요.”

 

뭐 가져가 놓고 입씻을 만큼 고가의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본 사람에게 선뜻 내주는 게 신기했다. 내일 내가 안 오면 어쩌려고. 근데 이런 식으로 한두 명씩 모았다가 만석이라 탈 자리가 없으면 어떡해? 뭔가 이름이라도 적고 제대로 예약을 받아야 되는 거 아냐? 이런 저런 의문이 들었지만 알아서 하겠지 싶어 별말없이 약속시간을 정하고 가게를 나섰다.

 

 

다음날 시간 맞춰 찾아온 식당 앞은 한산하다. 뭔가 틀어졌다는 예감이 바로 왔지만 조바심이 나진 않았다. 정 가고 싶으면 오토갈에서 버스를 타도 되고, 아님 그냥 여기서 차 한잔과 함께 여유로운 오전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어떡하죠? 차가 벌써 출발했는데..”

 

메멧은 미안하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아직 출발시간이 안됐는데 날 안 기다리고 갔느냐는 질문은 필요없었다. 상관없다고, 안 가도 된다고 하는데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출발한지 얼마 안된 차를 돌리라거나 아님 갔다가 다시 오라는 얘기일 거라고 짐작했다. 전화를 끊더니 자길 따라오라며, 가게는 놔두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한다. 뭔가 휘둘리는 느낌인데... 의심할 틈도 없이 헐레벌떡 따라가보니 길 건너 고급 레스토랑 앞에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가 서 있다가 우릴 보고 손을 흔든다. 

 

“이걸 타고 간다구요?”

 

눈앞에 있는 건 오토바이. 아까 전화는 메멧이 친구인 이 웨이터에게 오토바이를 빌리려고 한 거였다. 오토바이 타면 10분이면 간다고, 너무 미안해서 자기가 데려다 주겠단다. 

 

아니 어찌 처음 본 외간남자 등 뒤에 붙어서.. 하고 내뺄 이유가 없다. 배달용 오토바이처럼 시트가 평평한 게 아니라서 앞으로 몸이 쏠리는 게 신경이 좀 쓰이지만 뭐 어떠랴. 웨이터 친구에게 부탁해 기념사진 한방 찍고, 나도 모르게 들떠서 신나게 출발을 외쳤다.

 

순조롭게 셀축 시내를 빠져나온 오토바이는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풍경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도, 사이사이 햇빛이 스며든 나무들도, 시원하게 얼굴을 가르는 바람도 너무 좋다. 버스를 놓친 게 이런 행운을 불러올 줄이야.

 

 

 

 

 

근데 좀 이상하다. 빠르게 내 옆을 스치던 나무들이 갑자기 눈에 잘 들어온다. 얼굴을 가르던 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간질인다. 왠지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하이킹을 하는 느낌이다.

 

“......괜찮은 거예요?”

“잠깐.. 잠깐만요.”

 

부와아아앙 하던 오토바이 소음이 어느새 부릉부릉으로 바뀌더니 털털털털털.. 결국 길가에 멈춰버렸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단 내려서 기다리는데 오토바이를 이리 저리 살펴보던 메멧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야겠어요.”

“걸어서..? 에페스까지? 오토바이는 어쩌구요?”

“일단 여기 세워놓고 내가 이따 가져가면 되요.” 

“그럼 당신은 나 데려다 주고 다시 여기 걸어와서, 오토바이 끌고 시내까지 걸어 간다구요?”

 

뭔가 굉장히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애초에 차에 태워준다고 한 것도 메멧이었고, 날 기다리지 않고 출발시킨 것도 메멧, 괜찮다는데 굳이 오토바이를 끌고 온 것도 메멧이었지만 이쯤 되니 내가 염치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어딘지도 모를 이 대로변에서 혼자 움직일 수는 없다.

 

히치라도 해야될 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걸어서 에페스 가는 외국인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 유니크함에 위안을 삼았다. 

 

메멧을 앞세우고 걷기 시작하는데 문득, 이 모든 게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버스를 놓친 순간부터 이미 이런 예기치 못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상황이 웃기기도 했지만, 틀에 짜인 여행에서 한 걸음 더 멀어졌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날 설레게 했다. 별것없는 시골풍경이었지만 동아시아 끄트머리의 대도시에서 날아온 내 눈엔 차이점이 확연히 보였다. 햇빛과 바람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잎사귀들이, 들판을 채운 갖가지 초록빛의 앉은뱅이 나무들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지중해 연안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런 아름다운 길은 걸어가는 게 정답이었다.

 

 

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