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내 여행에서 셀축은 1) 정보없이 무작정 찾아왔고 2) 첨단 도시에 지쳤으며 3) 걷는 걸 좋아하는데다 4) 번잡한 곳을 싫어하는 외국인에게 맞춤한 도시였다. 적당한 시골 냄새가 풍기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교통수단을 익히기 위해 골치 썩을 필요가 없었고, 가끔 타겟이 되긴 했지만 장사치의 손아귀에서 적당히 비켜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거기다 날씨. 구름이 거의 없는 파란 하늘,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식혀주는 건조하고 선선한 바람, 서늘한 밤과 상쾌한 아침까지 어찌됐든 여행하기에 매우 좋은 날씨가 펼쳐졌다. 작은 배낭 하나 챙겨 들고 카메라 둘러 메고 몇 시간을 설렁설렁 걷다가, 슬슬 다리가 아파오면 카페 야외테이블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일정이라니. 완벽했다. 11시간을 날아와 10시간을 더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셀축의 대표적인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성요한교회도 그렇게 갔다. 아니 발견했다. 골목 골목을 돌아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니 유적지 비스무레한 곳이 보여서 들어갔는데, 처음엔 관광객도 거의 없고 한적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근데 내부를 둘러보다 보니 이게 범상치 않은 곳이라. 여긴 대체 뭐지 하며 기웃거리는데 한 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Hello. 어디서 왔어요?”
뻔한 문구. 셀축에 와서 마음이 좀 풀어지긴 했지만 이스탄불의 삐끼들을 이미 접한 지라 대강 얼버무리며 슬슬 뒷걸음질 치는데 아저씨가 눈치 챘다는 듯 허허 웃는다. 자긴 이곳 경비원이니까 걱정 말란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민망함에 따라 웃었다. 한국인이라고 했을 때 나오는 통상적인 반응을 상대하다 문득 생각나 물어봤다.
“근데 여기가 어디예요?”
순간 이 간단한 질문을 못 알아들은 아저씨의 멍한 표정이라니…… 죄송해요. 너무 준비없이 온 지라. 지도 보며 묻는 것도 아니고 이미 돈 내고 들어와 돌아다니다가 나 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한 꼴이니 어이가 없었을 거다. 어쨌든 아저씨 덕분에 내가 어디 들어와 있는지 알게 됐다.
성요한교회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에 널려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 없는 내게 큰 의미는 없었던 곳이기에 쓰진 않겠다. 다만 이곳이 기억에 남는 건 이런 문화유산-종교적 의미를 떠나 약 1400년 전 에게해 연안의 흔적-을 처음 접한 곳이자, 여기서 느낀 ‘안정감과 이질감의 황금비율’ 때문이다.
운이 좋았던 건지 시간대를 잘 맞춘 건지 내가 갔을 땐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소규모 단체 그룹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돌아다니다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내부는 한산했고, 덕분에 이 넓은 부지를 전세낸 것처럼 즐길 수 있었다. 유적지의 가장 큰 즐거움은 까마득한 과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찾아오는데 보통은 바글거리는 관광객에 치여 상상이고 나발이고 잘 안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선 가능했다. 페허가 된 교회는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름다운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기도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내 옆을, 내 뒤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여기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참 걸작이다. 이사베이 자미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도, 집과 길 사이를 채우고 있는 나무들도, 그 너머 들판도, 들판 너머 산도.. 눈앞의 풍경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나 정말 멀리 왔구나, 마구 실감나는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을 시원하게 그늘진 나무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볼 수 있다(이 명당은 가보면 바로 알게 된다. 안알랴줌). 여기 앉아 선선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음악도 듣고, 좀 끄적대고, 이런저런 생각도 했다가, 모든 생각을 지웠다가.
여행을 다니다 보면 내 오감이 완벽하게 충족되고 있다는 걸 느끼는,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감에 빠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때가 그랬다. 안정감과 이질감의 비율이 맞춰지면서 최상의 여행자 모드가 되는 거다.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 두 개의 표현이지만 여행 중 안정감이 커지면 불만이, 이질감이 커지면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두 가지 감정이 적절히 공존해야 비로소 여행자로서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 셀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서 나는 2년 만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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