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갔구만...
몸이 아직도 흔들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엉덩이는 깨질 듯 하고 온 몸에 피로가 몰려온다. 당장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가이드 3인방은 도착하자마자 어찌나 바쁜지. 텐트를 치고, 말들에 묶여 있던 짐을 풀고, 말들을 씻기고, 밥 지을 준비를 한다. 대장은 사라졌나 싶더니 나무를 한짐 해가지고 왔다.
모닥불을 피우고 새카맣게 탄(세월의 흔적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솥을 건다. 대장과 성무오빠는 계속 나무를 하고 연걸이는 음식을 만든다. 왜 저렇게 나무를 많이 하나 했는데 밤이 되면 산속 기온은 훨씬 내려갈 것이다. 갑자기 무서워졌다.-_-
매콤새콤짭짤한 오이무침과 밀가루 전병을 먹는데, 와, 한국인 입맛에 딱이다. 집에 해놓으면 매끼 밥한그릇 뚝딱이겠다. 아침먹고 바로 출발해서 내내 말타다가 오후 4시경이 되었으니 배가 엄청 고플만도 하다. 흙과 재가 뭍은 전병을 탁탁 털어서 오이무침을 얹어서 먹으니 말그대로 꿀맛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자마자 3인방은 저녁을 준비한다. 저기, 굉장히 배부른데-_-... 말해봤자 소용없다. 하기사 오늘 트래킹은 끝났고, 해는 일찍 질거고, 할일은 없다. 말먹이를 준비하고 다시 저녁밥을 짓는 3인방을 뒤로하고 근처 답사에 나섰다.
뭐 이런 느낌. 겨울이라 호수에 물이 줄어서 주변 땅이 질퍽하다. 살얼음이 언 계곡물을 건너 깊숙한 곳도 가보고 호수 앞에 앉아 그냥마냥 쉬었다. 이게 진짜 휴식이고 여행이구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물소리를 들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고 생각했는데 금방 땀이 식자 한기가 돌아 엄청 추웠다. 젠장.
각종 채소를 볶아 밥과 함께 저녁도 잘 먹었다. 배부르다 어쩐다 했는데 잘 들어간다. 끓는 물을 부어 기름기있는 냄비를 씻는 모습을 보니 설거지는 당연히 합성세제가 있어야 깨끗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내가 우습다. 하루만에 먼지투성이가 된 옷도 재가루가 들어간 음식도 아무렇지 않고.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모양이다. 화장실은 풀숲이나 바위 옆에서 대강 해결했고, 목이 마르면 계곡에 널려있는 얼음을 먹었다.
오후 8시경. 해는 벌써 지는데 아침이 되려면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았다. 어차피 2박 3일이나 함께 동고동락 해야 하는데 아까부터 밥을 아무리 같이 먹자고 해도 자기들끼리 나중에 먹는 저 현지인 가이드들과 친해져야겠다. 3대 3, 인원도 맞는데 같이 놀면 재밌겠다.
...라기 보다는, 이 와타루 놈을 떼어내고 싶다.-_-
지 입맛에 맞는 음식만 골라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아니 골라먹으면 다행이지, 맛없다고 안 먹는 건 뭐냐! 이런 산속에서 요리를 먹는 것 자체에 감사할 일이지. 우릴 위해 열심히 만들어 줬는데 그대로 남기는 건 정말 예의가 아니란 말이다.
거기다가 쓸데없이 자꾸 옆에서 질문하는 통에 지쳐버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경제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한 달에 얼마 버느냐, 미니멈과 맥시멈은 얼마냐, 한국에 돈벌러 올 심산인지 지독하게도 물어본다. 돌고래가 맥시멈의 월급을 대충 이야기해주고 연봉을 이야기해줬는데 한참 뭔가를 끄적거리더니 다시 묻기 시작한다.
연봉을 12로 나눴는데 돌고래가 말한 액수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_-
여튼 나와 돌고래는 어느 한명이 붙잡혀 있으면 한국말로 서로 구원요청을 하는 식으로 낮시간을 보냈다. 밤도 그럴 순 없어!
해는 완전히 졌고 모닥불은 활활 타오른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모두들 느긋하게 모닥불 옆에 모였다. 이런 자리에서 중국인들에게 술을 빼놓을 수 없지. 역시 작은 병을 꺼내더니 뚜껑에 따라주는데 후아, 진짜 독하다. 장난 아닌데?
나중에 라싸에서 이걸 한번 더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권했던 그리스 아저씨가 밀크티에 타서 줬었다. 부드럽고 알싸한게 맛있었는데... 갑자기 그리워지네.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정겹다. 서로 가족얘기도 하고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성무오빠를 시작으로 노래도 불렀다. 중국노래 일본노래 한국노래 다 부르고 나니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요즘 중국에 <인어아가씨>가 선풍적인 인기라서 그 얘기도 하고 김희선이 실제 나이가 몇이냐, 결혼했느냐 하는 것도 물어본다.-_-; 쏭판 사람들의 생활이나 이런 저런 가치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역시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게 재미인 것 같다.
와타루는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3인방과 대화한 뒤 영어로 통역해 주는 식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것저것 놓치고 통역할 수 밖에 없어서 와타루가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3인방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와타루가 옆에서 자꾸 딴소리를 해서 나 역시 답답했다. 이렇게 모였는데 각자 중국어, 영어로 떠들면 뭐가 재미있을까? 어떻게든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옆에서 자꾸 말을 끊는다.
내가 와타루를 안좋게 봤던 결정적인 시점이 이때였다. 일본에서 세계사를 가르쳤다고 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사실인지 의심스럽지만)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이다. 당장 직업도 없고 돈도 없으면서 앞으로 자기가 여행할 나라(매번 바뀐다)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중국을 여행하면서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다는 데에 있었다. 일본에서 적당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물가 낮은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돈이 떨어지면 들어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나오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중국이 아니더라도 그냥 되는 대로 여행할 수 있는 곳이면 충분한 모양이었다. 혼자 그렇게 다니다가 중국어를 조금 하는 우리를 만나서 이런 여행을 하니 재밌기도 하고 편하기도 해서 계속 같이 남쪽에 가자고 꼬시는 것이다.
물론 나도 여행을 평생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여행을 좋아하지만, '일상이 여행이 되어야지 여행이 일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여행이 더욱 행복하고 소중한 것이고, 더 열심히 살고 또다시 떠나오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받고 가는 것이 나의 여행인 것이다.
와타루가 물었다. 도대체 왜 티벳에 가려고 하냐고.
어릴 적부터 항상 꿈꿔왔었고, 지금이 적기라는 느낌이 왔고, 단지 가고 싶을 뿐이라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알리가 없다. 결국 한마디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It's my destiny."
"It's not a correct answer!"
........-_-
어쩌란 말이얏!
빨리 자기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란다. 아무리 말해도 못알아듣는다. 돌고래까지 합세해서 destiny를 외쳐댔지만 허공에 맴돌 뿐이었다. 나중에 라싸에서 만나게 되는 일본인 친구는 재깍 알아들었는데. 아씨, 말하니까 또 보고싶다. 우리친구 다카.
아무튼 그런 식으로 밤은 깊어갔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와서 텐트에 가려고 일어섰다. 동굴을 벗어나자마자 한기가 돈다. 그런데.
별이다.
쏟아질듯한 별무리가 하늘 가득이다. 1m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산속에서 오직 하늘의 별만이 반짝일 뿐이다. 이런 게 진짜 별하늘이구나. 아플만큼 고개를 꺾어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시골에만 가도 별이 많이 보인다고 좋아했었는데 그런 하늘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별이 너무 많다.
트래킹 하길 정말 잘했다.
요런 하늘이었습니다. 그림으로 그리니 허접하네요. 원래는 훨씬 이뻤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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