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뉴욕의 지하철은 꽤 편리하다. 지하철 편리하기로는 서울을 따를 자 없겠지만 적어도 일본보다 편리하다는 건 확실. 노선과 구간에 따라 티켓값이 달라지는 일본과 달리 메트로 카드 하나만 사면 어디든지 오케이다(물론 뉴욕 지하철을 그대로 서울과 도쿄에 옮겨놓는다면 얘기가 다르다). 보통 맨하탄의 세로 거리인 Avenue는 걷고 가로 거리인 Street은 지하철로 이동하기 때문에 Uptown과 Downtown만 확인하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
뉴욕에서 가장 많이 탄 지하철은 A라인이었다. 내가 빌붙은 돌고래의 집은 뉴저지였는데, 주가 다르긴 하지만 George Washington Bridge만 건너면 바로여서 생활권은 맨해튼. 뉴저지와 뉴욕이 만나는 이 다리가 지도상으로 맨해튼 꼭대기에 있어서 세로노선이 가장 긴 A라인이 거의 출퇴근용(?) 노선이었다.
하지만 자주 탔다는 것 말고도 A라인에 애착을 갖는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상상했던 뉴욕 지하철의 모습과 가장 가깝기 때문. 뉴욕의 지하철이 서울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후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실제로 뉴욕 지하철의 시설은 미관상 형편없다. 대부분의 플랫폼이 공사가 아직 덜 끝난듯한 모습이고 선로엔 심심찮게 커다란 쥐가 돌아다닌다. 별다른 광고나 꾸며놓은 것도 없어서 그야말로 황량 그 자체. 맨해튼 남쪽을 다니는 노선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의 대표적인 노선이 바로 A라인이다.
물론 이렇게 꾸며놓은 곳도 있다. 자연사박물관역.
일단 플랫폼이 무섭다. 눈에 보이는 시멘트나 철근이 안그래도 우울하게 만드는데 깊기는 또 얼마나 깊은지. 열차가 서울의 5~6호선급은 되는 노선들도 있는데 A라인은 1호선의 옛 기종보다 안 좋다. 덜컹덜컹거리면서 엄청난 스피드로 달리고, 역에 도착할 때마다 차장 아저씨가 못 알아먹을 뉴욕영어로 방송을 한다. 노선 중간에 할렘이 있다보니 백인비율이 적고 대체로 의상이나 표정도 어둡다(뭐 딱히 우울해보인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A라인의 모습이 내겐 기계가 방송하고 시설이 깨끗한 노선보다 훨씬 뉴욕다웠다. 그리니치쪽 이야기를 쓸 때 나올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게 뉴욕은 섹스 앤더 시티보단 다이하드. 왠지 모르게 후지고, 조금은 음침하고, 맥클레인 형사가 선로나 열차 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지하철이 가장 뉴욕스럽다. 맨해튼에 나온 첫 날, 정말 뉴욕에 왔다는 느낌을 A라인 덕분에 더욱 강하게 느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그놈의 다이하드 때문에 '연방준비은행'을 굳이 굳이 찾아갔었다. 영화 한 편을 반복해서 보는 나는 은행이 나온 정경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는데, 내 기억과 좀 달라서 역시 촬영은 다른 곳에서 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찾아보니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미니투어가 있는 모양. 그 대단한 금괴도 볼 수 있다는데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뉴욕 지하철의 매력은 아마추어들의 즉석 공연.
쇼생크탈출의 모건 프리먼 같은 아저씨와 청년이 들려준 음악은 정말 신났다. 별다른 가사 없이 추임새만 넣으면서 계속 이어가는데, 그 선율이 어찌나 흥겨운지 멀쩡하게 생긴 30대 직장인이 그 앞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 타야 될 열차를 계속 보내면서 그 앞에서 시간을 보냈을 정도.
그리고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지하철 공연은 이것이었다.
날도 흐렸고, 우울까지는 아니지만 별로 기력이 없었던 어느 날. 늦은 시간에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질 않더니, 약간의 사고가 생겨 지연되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특별히 할 것도 없고 멍하게 서 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차가 올 때까지 즐겼던 한 남자의 작은 공연. 'Stand by me', 'My girl', 'Ain't No Sunshine' 등 모두가 알만한 노래를 부르니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모두의 합창이 된다. 열차가 늦어지다보니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남자는 노래 중간 중간 열차 지연소식을 전했다. 열차가 문제가 있어 늦어지고 있다, 아마도 30분쯤 걸릴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괜찮다, 내가 있으니까.
옆에서 구경하던 10대 소녀들에게 함께 춤을 추며 노래하자고 하더니 자신은 슬쩍 빠지고 어느새 소녀들은 코러스걸이 된다. 노래가 거의 끝날 무렵 기막히게 열차가 도착했다(영상으론 잘 안 느껴지지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웃으며 노래하고 박수를 쳤다). 정말 무료하게 보낼 수도 있었던 시간을 너무나 즐겁게 보내게 해준 것에 대한 답례는 1달러 이하의 지폐나 동전. 사람들이 거의 간 후 바로 옆에서 내내 보고 있던 내가 돈을 넣는 순간 마침 조금 떨어져있던 남자는, 멀리에서 입모양으로 'Thank you'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의 모습이, 이게 바로 뉴욕이라고, 뉴욕의 매력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평범한 일상에 끼어드는 예기치않은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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