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6. 19:27 ▶ nomad/'04 Tibet



특별히 멋진 곳은 아니었어. 춥긴 해도 여행 내내 하늘은 맑았는데 유일하게 눈보라를 맞았던 곳이기도 하고. 딱히 이야깃거리가 많은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야.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곳을 떠올리면 웬지모를 편안함이랄까 그리움이랄까... 그런 게 많이 느껴져.



사실 샤허에 도착했을 땐 끊임없이 이어진 이동에 너무 지쳐있었어. 더군다나 우여곡절끝에 도착해보니 리틀 티벳이라는 별칭과는 달리 꽤 번잡하고 규모가 있는 곳인 거야. 물론 도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곳이지만, 제대로 된 불빛도 없는 마을들을 거쳐서 도착한 우리에겐 별천지나 다름없었거든.

그동안 거의 보지 못했던 여행자들까지 마구 보이니 약간 묘한 기분도 들었어. 동지들을 보는 기쁜 맘도 잠시, 우리가 이곳의 유일한 이방인이 아니라는 건 뭐랄까... 싫었던 건 아냐. 그냥 묘하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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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해 짐을 푸는데 그제서야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뭔가 안정이 되기 시작했어. 방이 너무 좋은 거야. 침대도 '이만하면' 너무 푹신하고, 화장실도 '이만하면' 너무 깨끗하고, 공동이긴 해도 세면장엔 뜨거운 물이 나오고, 글쎄 방에는 TV까지!

하지만 역시 가장 좋았던 건 스팀이었어.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거든.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일단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나왔어.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식당, 너무나 맛있는 음식, 편안한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장족들,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 머무른다는 정착감에서 비롯된 여유. 우습게도 '이런 게 행복인가' 싶더라니까. 말그대로 등따시고 배부르니 행복하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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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안정적인 상황이 되니까 현실적으로 몸이 많이 힘들었던 그동안의 일정이 정리가 되면서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점검도 할 수 있었어. 뭐,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샤허는 이 여행의 중간기점 역할을 하게 된 거야. 사람이 그렇잖아? 아무리 좋아서 하는 것도 매분 매초 앞으로만 매진할 수는 없어. 마침 재충전 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했던 우리는 이에 딱 맞춤한 장소에 있었던 거지.



더없이 여유로워지자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밀린 빨래. 속옷과 양말같은 건 손빨래를 하고 그동안 한번도 갈아입지 않은 최전방 겉옷은 세탁을 맡겼어. 배낭을 탈탈 털어 짐을 다시 정리하고 나 자신도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고 나니 정말 오랜만에 나른한 기분이 되더라. 느긋하게 편지까지 썼는 걸. 어떻게 전하냐고? 이곳엔 우체국도 있어!

상상을 깨서 미안하지만 이곳은 오지도 아니고 과거 속에 존재하는 곳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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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선반 아래에 스팀이 있거든. 쭈그리고 앉아서 빨래 말리는 중이야.



오랜만에 TV도 안 볼 수 없지. 즐겁게 본 건 아니었어. CNN은 쓰나미 소식을 반복해서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쓰나미,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거든. 시간이 좀 지났으니 속보는 아니었지만 다큐필름같은 느낌의 프로그램이 줄창 나오고 있었어.

한국에서야 매일 쏟아지는 뉴스에 파뭍혀 살지만 여행다닐 땐 그렇지 않잖아. 엄청난 뉴스들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알게 될 때는, 겪어보면 알겠지만 참 기분이 이상해. 이게 두려워서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고.

그러고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네. 그때도 장소는 중국이었고 역시 돌고래와 함께였어.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얼마전에 지하철 사고가 나서 여기 난리났다"고 하는 거야. 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 도미토리에 틀어져있던 TV에서 한국 지하철 사고 어쩌고 하는 걸 언뜻 본 것도 같았는데, 역시 그냥 흘려버렸어. 외신에 나올 정도면 엄청 큰 일이라는 얘긴데 왜 그땐 눈치를 못챘을까.

짐작하다시피 대구 지하철 참사였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신문을 보고 알았지. 국적기여서 거의 우리나라 사람이었는데, 이제야 알게 된 사람이 나 말고도 꽤 되는지 기내 분위기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어. 비행기 안에서 여행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곱씹어보려던 나는 결국, 온통 참사 소식뿐인 신문을 보면서 돌아오는 내내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말았어.

별로 즐겁지 않은 기억은 그만하고.
여하튼 샤허에서 나는 몸과 마음의 고삐를 풀어두고 잠시 좌표를 잃은 내 여행을 다잡을 수 있었어.
처음으로 티벳행을 고민하게 만든 곳도, 결국 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한 곳도 바로 샤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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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