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감에 있어 대표적인 단점은 역시 매사에 흥미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릴수록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 것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이 가기 때문이라더니. 익숙한 편안함을 찾는 건 양반 수준이고, 새로움을 발견하는 눈 자체가 무뎌지는 것 같다. 좀 더 우울하게 써보자면 내가 가지고 있던 열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그저 하는 것만으로, 아니 하는 상상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 글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언가를 하겠다며 계획을 세우고 의욕적인 시작을 했던 기억은 까마득하지만, 문득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물론 실행에 옮기진 않는다. 머릿속을 떠도는 단상들을 잡아채 역시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고 수정하고 얼기설기 엮어보다가 아, 써봐야지, 하고 만다. 딱 여기까지의 의욕인 것이다. 어쩌다 한 번씩(이라고 하지만 연례행사 수준으로) 글을 쓰겠다고 폼을 잡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두세 단락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나마 마음에 들어 하는 내 글은 일필휘지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몇 시간에 걸쳐 그 정도밖에 쓰지 못했다면 이미 그 글은 틀린 것이다.
덧붙이자면 일필휘지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한 번에 끝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단 시작하면 큰 어려움 없이 쓰고자 했던 내용의 80~90% 정도를 써낸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다듬기도 하고 특히 마무리 부분은 좀 더 오랜 시간 고심하기도 하지만 글 자체는 이미 한 번 써놓은 큰 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온 글이 쓰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이후 두고두고 보게 되곤 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글쓰기를 대하는 방식,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글쓰기는 쓰는 그 시점의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을 떠돌던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확장하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뱉는 과정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지도 않고 남보다 잘난 글쓰기도 의미 없다. 한때는 다른 이들의 글과 비교하며 고민도 하고 내보이기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는데 어차피 이젠 그런 글쓰기 자체를 하지 않는다. 비교와 평가가 함께 하는 글쓰기가 의미 없는 게 아니라 내게 있어 글쓰기의 의미 자체가 다른 것이다. 사실 나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거창하게는 자아 성찰이자 작게는 유희 거리다. 종이와 펜만 있다면 뭐라도, 언제까지라도 써내려 갈 수 있다. 아쉬운 대로 스마트폰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손을 재게 놀려도 내 머릿속의 속도와 차이가 커서 금방 포기하는 게 문제다.
뒤늦게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은 내게 글쓰기가 소통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누구와? 상관없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끊임없이 퇴고하고 확인하며 때로는 불특정 타인에게 보이는 행위는 결국 글을 통해 나를 내보이고 세상이 다가와 주길 바라는 일종의 구애와 그에 대한 자기만족이었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소통의 결과가 없어도 상관없다. 글을 완성하고 종종 공개된 공간에 두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소심한 외골수의 참으로 가련한 소통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정해진 이상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자기애의 발현이자 방어기제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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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고 내버려둔 것이 반년 전.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것들로부터 벗어나 침잠하는 시기가 되어 다시금 깨닫는다. 글쓰기는 내게 최후의, 유일한 보루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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