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6. 19:56 ▶ nomad/'04 Tibet



티벳을 여행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라면 가기 전에 꼭 체크하는 곳이 바로 타쉬 레스토랑이다. 라싸의 배낭여행자들이 모두 모이는 정보의 메카로 알려져 있으며, 다들 그렇게나 맛있다는 치즈 케이크를 먹어보려 하는 곳.
그 말이 맞는 것이, 처음 라싸에 도착한 뒤 아파서 며칠 동안 타쉬에 죽치고 있었는데 라싸의 외국인 여행자는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매일 만나서 눈인사를 나눴던 그리스인 니코와 호주인 토니, 중국계 며느리와 함께 온 프랑스 부부, 우리 도미토리에 있는 호주 여자애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아이들, 몇번 얼굴만 익히다가 같이 비행기를 타고 청뚜에서 같은 호텔에 투숙했던 스코틀랜드 부부, 처음 도착했을 때와 중간에 만났던 인도인 여행자, 한국인 여행자들, 운명같은 친구가 된 일본인 다카... 모두 타쉬에서 만났다.



가장 처음에 만났던 반가웠던 인연은 한국인 여행자 강혜정씨였다. 야크호텔에 갔던 첫 날, 체크인을 하는데 투숙객 명부를 보다가 한국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야야야! 한국인!"
"어, 진짜! 강혜정? 여잔가부다!"
"우리 오기 하루 전에 체크아웃 했어. 아씨, 만날 수 있었는데."
"언제 왔지? 가만있자... 3일 전이네? 그럼 여기 있겠다."
"하긴, 티벳여행하면서 3일만 있을 리는 없고... 시가체나 어디 외곽으로 나갔겠지."
"아님 다른 호텔로 옮겼던가. 어쨌든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날 타쉬의 게스트북에서 그녀의 글을 발견했다. '아무리 비수기라지만 대체 한국분들 어디계신 겁니까~ㅠ_ㅠ' 그녀의 절규를 십분 이해했다. 우리도 한국인 여행자를 한 번도 못봤기 때문에 후에 이종옥씨를 처음 만났을 때도 혹시 이름이 강혜정 아니냐고 물어봤었으니까.-_-; '저희 여기 있습니다!' 하고 글을 남긴 다음 날, 기적처럼 강혜정씨를 만났다.

혼자 앉아있는 폼이 아무래도 한국인 같아서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 역시나였던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나는 한국인, 그것도 나홀로 여행자, 그것도 여자! 너무너무 반가웠다. 어떤 사람일까 엄청 궁금했는데 약간 터프한 것 같기도 하고 씩씩하게 홀로 여행을 하는 멋진 사람이었다. 돌아갈 때 역시 버스를 타고 꺼얼무로 나가서 기차를 타고 북경까지 간 뒤 배를 타신다는데...... 하아. 그 버스를 다시......(아련해진다...=_=) 건투를 빌었다. 나중에 바코르 광장에서 한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여전히 밝고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았다.



라싸에서 가장 큰 인연이 된 니코와 다카도 타쉬에서 만났다. 그날, 그러니까 언제더라. 하늘로부터 만남의 기운이라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날 모두를 만났다.

며칠을 타쉬에서 죽치다보니 매일 오는 서양남자 둘을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처음엔 그냥 눈인사만 했다. 그러다가 간단한 인사를 하게 되었고 그날 합석을 한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인 니코와 호주인 토니인데 처음엔 둘이 너무 비슷해서 형제인 줄 알았다. 토니는 온지 사흘밖에 되지 않아 아직 포탈라궁도 못봤는데 그날 호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대학강사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여하튼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쯧쯧.

그날 부로 니코는 우리와 한 팀이 되었다. 니코는 50대 후반 정도 되었는데 평생을 여행한 사람이다. 어느 나라를 가봤는지, 얼마나 여행했는지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여행광이다. 원래는 수학선생님이었는데 지금은 미코노스 섬에서 큰 레스토랑을 하고 있다. 2~300명이 들어가는 인기좋은 레스토랑인데 밤만 되면 거의 파티수준의 술판이 벌어진다고 한다. 각자 즐겁게 춤추고, 음악듣고, 음식을 즐기며 놀기 때문에 어떨 땐 새벽 서너시까지 일한다나. 그리스에 가면 들릴 예정이다.

니코는 여름엔 그렇게 일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여행을 다닌다. 평생을 다녔기 때문에 어느 대륙 어느 나라 이야기를 해도 얘깃거리가 끊이질 않아서, 니코의 여행담을 듣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니코는 몇년 전에 티벳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땐 국경이 언제 열릴지 몰라 네팔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다가 퍼밋이 떨어졌을 때 그 기쁨은... 니코의 표정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그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환희에 찬 표정이 되었다-_-;). 아무튼 니코는 박식하기도 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다카는 우리에게 해외여행은 영어실력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우쳐준 사람이다. 처음에 들어와서 타쉬 종업원들과 어찌나 스스럼없이 얘기를 하고 수다를 떠는지 서로 잘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워낙에 사람이 밝고 스스럼없어서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그렇게 얘기하다가 우리한테도 말을 걸어서 테이블 너머로 몇마디를 했는데, 계속 고개를 돌리고 말을 시키길래 합석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냉큼 옆자리로 왔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끝내고 여행 중인 다카는 정말 영어를 못한다. 진짜 못한다. 그냥 문법무시하고 대충 말해야 오히려 잘 통한다. 그러다보니 한국인인 우리와는 더 얘기하기 편했지만. 다카는 우리 도미토리의 호주여자애와 친구인 미국여자애도 잘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대화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다카는 더없이 소중한 친구다.



니코와 합석하고, 다카도 옮겨오고, 그러다가 인도인 여행자가 도착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모습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배낭여행자들이 모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나누는 모습. 그것도 말로만 듣던 '타쉬 레스토랑'이 배경무대. 너무나 행복했다. 언어는 문제가 아니었다. 못알아들으면 천천히 이야기하면 되고 그래도 모르면 몸짓으로 하면 되니까. 한마디 한마디 해석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면 나이, 국적, 성별과 상관없이 즐겁게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것이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다시한번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여행을 온 '장소'에 대한 추억도 잊을 수 없지만 '사람'이 더해져야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것이다. 샤허의 라브랑 사원에 갔을 때 엄청난 규모의 티벳탄 사원도 인상적이었지만 ㅡ 거기서 우리보고 반대방향으로 돌라고 알려준 현지인들, 오체투지를 하며 그 넓은 사원을 도는 할머니,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놀라며 여행 중이라는 걸 안믿겨하는 티벳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게 의미있지 못했을 것이다. '장소'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거기서 만나는 '사람'으로 인해 쌓이는 추억은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