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16. 14:39 ▶ scrawl

 

 

 

 

1934년에 태어난 나는 9남매 중 일곱번째 딸이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딱히 이상할 게 없던 시절, 계집애도 글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신 20여 년 터울의 맏오라버니 덕분에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늦게 입학한지라 치마저고리에 단발머리를 흔들며 십리 넘게 걸어서 가는 길이 그저 좋았다. 학교와 가까운 오라버니 집에서 다니라는 말에 한동안 집을 떠나 있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집을 그리워하며 매일 밤 베갯잇을 적셨고, 이를 불쌍히 여긴 오라버니 내외가 다시 본가로 보내주었다. 나는 다시 힘차게 십리를 걸었다.

 

입학하기 전 오라버니는 매일같이 나를 앉혀놓고 우리집 주소와 내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쓰는 연습을 시켰다. 한자를 배운 건 잘한 일이었다.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한자 공부를 많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내 이름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와다나베 게이랑으로 불리웠다. 이름을 부르면 일본어로 대답해야 했고 수업 시간에는 한자와 히라가나를 배웠다.

 

전쟁이 발발하고, 머리 위로 전투기가 지나는 일이 잦아졌다. 동무들 수십 명과 선생님을 따라 논으로 나가 폭격 대비 훈련을 했다. "데키노히코키다!" 하고 소리 지르면 너도 나도 논두렁에 콕콕 박혀 귀와 코를 막고 힘껏 숨을 참아야 했는데, 폭격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다 같이 그러고 있으니 재밌는 놀이 같았다. 그러던 어느 해 어느 날 해방이 되었다. 아마도 해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학교 운동장에 가득했던 사구라나무가 잘리고 파헤쳐지는 걸 보며 나무가 무슨 죄라고 저러나 싶었고, 구부정한 허리의 노인이었던 일본인 교장이 쫓겨나는 걸 보며 아마 저 사람은 본국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한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모두가 무언가 바쁘고 정신없고 흥분한듯한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회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시골에서 학교야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었다. 한참 뒤 다시 나갔을 때는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 조선말로 대답해야 했는데, '하이'하던 습관을 고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또다시 전쟁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가친척들이 전부 우리집으로 피난을 오기 시작했다. 집은 복작거리고, 설상가상으로 맏오라버니가 몸져 누우면서 학교는 뒷전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평생 학교에 갈 일은 없었다.

 

 

 


 

 

 

* 재작년 가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후회되었던 점은 당신의 생전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일제시대는 어땠는지, 만주에서는 어떻게 돌아오셨는지, 동란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언젠가 물어봐야지 생각만 하다 황망히 돌아가신 뒤에야 후회를 했다.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치하하거나, 거창하게 민족의 굴곡진 역사를 느끼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기록된 역사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삶이 지나온 역사가 궁금했다.

 

* 그래서 외할머니와 이른 새벽 산책을 나서며 7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묻고 또 물었다. 위의 내용은 일인칭 시점으로 문장을 손보기만 했을 뿐 외할머니가 말씀하신 내용이 가감없이 들어 있다.

 

*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한 노인의 삶이 놀라움으로 다가올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단절되어 있었다.

 

* 할머니 발음대로 적긴 했는데 실제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아마 와다나베 게이랑은 와타나베 케이란, 사구라는 사쿠라일 것이다. 또한 할머니는 데키노히코키가 일본어로 비행기라는 뜻이라고 말씀하셨다. 데키는 '적', 노는 '의', 히코키는 '비행기'. 결국 적군 전투기. 지금은 일본어를 전혀 못하시는 할머니는 그 시절 외쳤던 대부분의 일본어를 기억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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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