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6일의 기록
일본어에 마이붐(マイブーム)이라는 표현이 있다.
말그대로 영어의 my boom. 즉 자기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 최근 빠져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어에서 한자 못지 않게 골 때리는 것이 영어를 섞고 축약까지 해서 멋대로 만드는 신조어들인데 이 마이붐만큼은 꽤 즐겨썼다.
무언가에 한번 빠지면 순식간에 덕후 인증 수준까지 갔다가 금세 또 다른 것에 빠져들고 마는,
빈번히 바뀌지만 농도는 짙은 내 취향을 설명하기에 가장 쉬운 단어이기 때문이었다(내 지식이 넓고 얕은 이유가 있다).
최근의 마이붐은 '홍콩', 정확히 말하면 '홍콩영화', 세심하게 말하면 '홍콩영화를 즐겼던 시절에 대한 향수'.
마이붐은 항상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좀 연유가 있었던 것이..
실은 얼마 전부터 문화생활을 즐겼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영화와 책, 음악 등을 가장 풍부하게 즐겼던 시기는 10대. 팝이나 재즈는 물론 왠 제3국의 전통음악까지 들었고
이름도 생소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 포스터를 구하곤 기뻐하기도 했다(영화는 분명 제대로 이해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20대에 들어선 이후 정말 내 문화적 욕구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물론 영화 한 편, 책 한 권을 안 본 건 아니지만.. 그 시절처럼 닥치는대로 흡수하던,
굳이 '독서'나 '음악감상'이라는 단어를 붙일 필요도 없이 그냥 보이는대로 보고 들리는대로 듣던 시절은 끝이 났다.
취향이라는 게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감수성 풍부했던 그 시절로 완벽히 돌아갈 순 없겠지만
강제성을 동원해 습관을 들이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무슨 문화 수준을 높이거나 지성인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는 아니었고..
나도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가 원했던 건 예전과 같은 왕성한 문화적 욕구가 아니라- 그냥 그 시절 자체라는 걸 깨달았다.
희망 밖에 없었던, 꿈꾸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시절.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가장 잘 안 읽는 장르지만 그래도 쉽게 넘어가는 소설부터 시작했다.
책을 잡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읽어내는 스타일이라 성미에 맞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도중이나 출퇴근 때 찔끔찔끔 읽었다.
주말에는 무조건 영화 두 편이었다(극장에서 보고 싶었으나 정말이지 보고 싶은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운받아 봤다).
그리고 음악은.. 오랜만에 mp3를 접어 두고 먼지쌓인 씨디들과 커다란 서랍 안에 채워둔 카세트테이프들을 들어보기로 했다.
중학교 때 동네 레코드샵에서 부지런히 사모았던 테이프들 중에는 중화권 스타들의 음악도 꽤 있었고
홍콩영화의 유명 주제가들 모음집을 복사해놓은 테이프도 발견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한 번도 듣지 않았던 음악들을 들으며 갑자기 내 머릿속에는 온통 '홍콩'만이 가득해졌다.
쓸데없이 길었지만 어쨌든 다시금 불타오른 홍콩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나의 마이붐은 사실 어떤 사물에 대해서보다는 어느 국가, 그 국가 전반의 문화에 관한 것일 때가 많다.
여행이라면 무조건 환영하지만 마이붐이 시작되면 빠져있는 나라 외에 다른 나라는 눈에 안 들어온다.
그건 오랫동안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지금 내겐 이집트보다 홍콩이 더 가고 싶은 곳일 정도.
일단 마이붐이 생기면 mp3가 전부 관련 문화권 음악으로 채워지고, 대형서점에 가서 가이드북이나 여행기를 모조리 훑어보게 되고,
식사를 할 때도 그 나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으로 향하게 된다. 일상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마이붐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중화권 스타들의 노래를 한없이 반복해 듣는 것도..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딤섬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홍콩 같은 경우는 마이붐으로 꽤 반복되는 나라이니 기간이 길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당분간 내 삶의 초점은 홍콩, 홍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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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80~90년대의 최대 호황기를 기억하는 것 뿐이다. 더군다나 그 시절에 아슬하게 발을 걸쳐놓은 세대인지라.. 주변에는 홍콩영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친구들도 많다. 하기사 돌고래조차 관지림을 모를 지경이니, 그 시절 홍콩영화에 대한 애정을 풀어놓기 위한 창구는 <스크린>과 <로드쇼>가 유일했다. (20대 초반에 미련없이 처분한 저 잡지들과 그에 딸린 부록들이 지금에 와서 어찌나 아까운지.. 정말이지 이럴 땐 수시로 뭔가를 잘 버리는 내 성격이 원망스러워진다)
이러한 연유로 나의 홍콩은 90년대에서 멈춰 있다. 그러니까 그 대단한 장쯔이도 '내 마음 속의 홍콩영화계'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적어도 홍콩 여배우라면 양자경, 매염방, 공리, 장만옥, 오천련, 왕비, 막문위, 유가령, 양채니, 왕조현, 관지림, 임청하, 종초홍, 종려제, 구숙정, 원영의... 더 안써도 되겠다. 남자배우들은 쓸 필요도 없겠다. 아, 한글로 표기한 중국이름의 미묘한 이질감도 내겐 중요한 부분. 몇 년 전부터 표기법이 바뀌었지만 임청하는 임청하지 린칭샤가 아니고 성룡은 성룡이지 청룽이 아니다. (나의 홍콩영화계에 장쯔이는 못 들어오고 한살 어린 장백지가 들어있는 건 아무래도 이름표기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홍콩영화가 왜 좋았냐고 물으면 딱히 할말은 없다. 영화라면 무조건 좋아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도 굳이 꼽는다면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홍콩배우들의 이유 모를 끈끈함. 중국인 특유의 느낌인지 영화의 이미지인지 모르겠지만 홍콩배우들은 뭔가 의리가 있어 보였고(내막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특히 예전 홍콩스타들은 내한도 잦고 공중파 방송에도 심심찮게 출연해서 괜히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몇년 전 매염방의 기자회견이 생각나는데.. 자궁암으로 투병 중임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담담했던 매염방의 강인함 못지 않게 인상에 남았던 것이 그 자리에 배석했던 동료들이었다. 성룡, 장학우, 유덕화, 사정봉, 양자경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뒤에 늘어서서 그녀를 비호하는 듯이 선 모습은 내 기억 속 홍콩스타들의 그것과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이들이 이렇게 지켜주는데 그녀가 쉽게 갈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은 오판이었지만.
사설이 길었는데 어쨌든 마이붐이 홍콩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대형서점의 홍콩여행기를 훑는 것이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건 홍콩 쇼핑 노하우, 유명잡지 에디터가 추천하는 홍콩 쇼핑스팟, 홍콩 쇼핑 명소 베스트.. 분명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홍콩영화에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온통 쇼핑얘기 일색이었다. 영화를 테마로 여행한 사람이 정녕 없단 말인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며 인터넷을 검색해 찾은 것이 바로 이 책.
홍콩에 전혀 관심없는 이들, 쇼핑을 뺀 홍콩에는 아무 감흥없는 이들, 세세한 정보와 가이드라인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비추천이다. 그저 홍콩영화를 지독히도 좋아하는 팬이 눈길 발길 닿는 곳마다 영화를 떠올리며 새겨놓은 추억의 기록일 뿐이다. 거기다 홍콩영화에 대한 저자의 지식이 어찌나 방대한지 언급한 영화들의 반 이상은 모르는 작품들이었다. 작품을 모르는데 촬영지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을 할 수 있냐고? 물론 못한다. 하지만 내가 공감한 것은 저자의 여행 그 자체. 남자주인공이 매일 여자주인공을 데려다주었던 길이 직접 가보니 예상보다 훨씬 멀다는 것을 깨닫고 여자주인공에 대한 남자주인공의 사랑이 생각보다 깊었구나, 하고 느낀다. 직접 발로 걷고 눈에 담으며 영화와 배우와 배역을 떠올리고는.. 때론 기억의 편린을 짜맞추고 때론 더 깊게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홍콩 여행을 구현해 놓은 것 같아 읽는 내내 즐겁고, 고마웠다.
생각해보면 그 대단한 홍콩영화의 아성이 사라진 '지금'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홍콩영화가 더 그리운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있을 땐 그 가치를 모르는 법이고, 스러진 것이 더 아름다운 법이고, 못 먹는 감이 맛도 좋아 보이고.. 아닌가? 어찌됐든 모든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되돌리지 못할 시간에 대한 아쉬움으로 그렇게 홍콩영화를 기억하려 애쓰는 것일 지도.
이 책은 홍콩영화팬이라면 그 어느 하나 주옥같지 않은 내용이 없는데 내 경우엔 우연히 관지림을 만난 부분, 아니 '장국영에 대해 이야기하며 순식간에 눈물을 맺는 관지림'을 만난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것도 만다린 오리엔탈에서. 멈춰버린 시간을 계속 되풀이하며 그리움을 달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내게 홍콩영화와 장국영은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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