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6. 21:49 ▶ nomad/'04 Tibet



벌써 밤 11시.

마지막이 아쉬워 늦게까지 Bar에서 죽치고 있다. 소중한 친구 다카가 내일 떠날 예정인 것이다. 피곤해진 니코는 이만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하며 다카와 이별포옹을 한다. 그렇게 티격태격 대더니 마지막은 역시 아쉬운 모양이군. 그러더니 때마침 나오는 흥겨운 팝에 맞춰 흔들흔들 춤을 추며 돌아갔다. 가끔 저렇게 술에 약간 취해서 음악을 즐기는 니코를 보면 확실히 유러피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니코 나이의 아저씨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 아닌가.

셋이 남으니 또 나름대로 오붓해졌다. 중고등학교 때 워낙 일본 만화에 빠져있었던 터라 만화얘기만 해도 시간이 절로 간다. 리젠트 머리를 그려놓고 낄낄대기도 하고, 특공대 복장을 설명하다가 일본 청소년들의 폭력성까지 얘기가 흐르기도 했다.-_- 문화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많다보니 서로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다카는 지금 서른 한 살인데 인생이 한 편의 영화다. 고등학교 때 소위 문제아였던 다카는 하루라도 아버지와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대학은 언감생심, 고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했다(한마디로 가출-_-).

그는 이런저런 안해본 일 없이 도시를 배회하다가 스물 두 살에 회사를 차린다. 백화점 등지에 구두를 납품하는 일종의 중간상인 역할을 하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배송전문업체라고 해야되나. 시작하자마자 좋은 건수를 잡아서 회사는 급성장 하게 되고 직접 구두를 생산하게까지 되는데 그 와중에 사랑하는 여자도 만나게 된다.

당시 다카 나이 스물 둘, 여자 나이 서른 둘. 이제 겨우 어른의 문턱에 들어선 다카는 평생을 두고 못잊을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7년동안이나 동거를 하며 사랑을 키우게 되는데 그만 일본경제에 불어닥친 폭풍으로 다카의 회사도 쓰러지게 된다(다카는 그때 구두가 너무 많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수백켤레씩 나눠줬다며 낄낄거렸다 -_-;;).

설상가상으로 병에 걸린 다카는 죽기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둘은 헤어지게 된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는데- 다카는 희망없는 자신때문에 그녀가 힘든 게 싫었고, 그녀도 자기가 옆에 있으면 오히려 다카가 힘들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단다.

다카는 겨우 죽을 고비를 이겨내고 회복을 하게 되고, 그제야 아버지와도 화해를 한다. 어차피 남자형제들이 많아서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을 걱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장남이니 나이드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 그렇게 몸을 추스린 뒤 다카는 그녀를 잊고 자신도 새로 시작하기 위해 호주로 1년간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그간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듯 영어를 공부했을 턱이 없다. 영어도 호주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배운게 다였다. 호주에서 돈을 벌어 여행을 떠났고 1년 5개월째, 라싸에서 우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벌써 마흔 둘, 아마 결혼을 했을거라고 말하는 다카의 모습이...

"...다카...T^T"
"왜, 왜그래-_-;;"
"너무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야. 슬프다...ㅠ_ㅠ"
"우리 완전 감동받았어.ㅠ_ㅠ"
"다 지난 일이야-_-;; 아마 그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거야."
"그래서 다 잊은 거야? 내가 보기에 절대 못잊었을 것 같은데..."
"잊은 것 같아...아니, 다 잊었어."

7년사랑 잊는데 1년가지곤 부족하겠지. 암튼 그래서 다카는 일본에 가면 다시 사업을 일으킬 생각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명민해보이는 다카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카가 할 줄 아는 한국어는 딱 두 마디다. 처음 타쉬에서 다카가 말해줬을 때 정말 레스토랑이 떠나가라 배를 잡고 웃었다. 자기도 한국말 안다고 하더니 하는 말.

"음......... 오빠 못믿나."

푸하하하하ㅠ_ㅠ
아니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외국인 발음으로 들으니 진짜 웃긴다. 무슨 뜻인지 아냐고 했더니 안다고 한다. 호주에서 만난 한국남자애가 가르쳐줬다는 거다. 그리고 또 한마디.

"음... 어......... 인터넷 30분 무료."

아하하하하ㅠ_ㅠ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고 하니까 호주 공항에서였나 버스정류장에서였나, 내리니 아줌마들이 지나다니면서

"인터넷 30분 무료! 30분 무료!"

하고 중얼거리더라는 것이다. 정말 웃다가 죽는 줄 알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행이 꿈이었다. 그 중에서도 홍콩영화와 대륙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중국은 정말 가고 싶은 나라였고, 전생에 이집트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이집트를 미친듯이 좋아했고, 언제나 불현듯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싶은 나라는 페트라가 있는 요르단이었다. 근데 어느날 보니까, 이 세 나라의 앞글자를 따면 내 이름 이니셜인거다! (내 이니셜은 CEJ, 국가들의 영문명은 China, Egypt, Jordan) 그래서 아, 이게 바로 운명이구나 싶었다.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다카가 즉시 반응을 보인다.

"오오오... 기발한데? 진짜 신기하다. 그럼 어디 나도..."

그리고는 다카는 즉시 자신의 이름에 나라들을 배열하기 시작했다. 다카의 일본이름은 TAKANOBU. 타이완, 오스트레일리아, 코리아, 아르헨티나... 하나하나 껴맞추며 즐거워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O가 떠오르질 않는다.

돌고래 : "뭐가 있지?"
만물상 : "글쎄...O...오만? 에이, 현실적으로 갈 가능성이 좀 있어야지."
돌고래 : "근데 오만의 첫글자가 O는 맞는거야?"
만물상 : "가만있자, 대륙별로 훑어봐...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돌고래 : "진짜 없는 거야?"
만물상 : "...오리온!!!"
다카, 돌고래 : "...-_-?"
만물상 : "왜? 왜? 오리온 어때서!!"

그리고 한참 뒤.

다카 : "정말 오리온밖에 없는거야-_-?"

그리고 낙찰.

다카 : "그래, 오리온이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오리온에서 만나기로 했다. 뭐 어때, 정말 갈 수 있을지 누가 알아.



"나 내일 안가려고."
"뭐라고-_-!!!!!!!"

시간은 흘러 밤 12시가 넘었다. 다카에게 너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하니 그만 가자고 했는데,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결정을 한다. 다카는 네팔로 넘어가기 위해 먼저 시가체쪽으로 떠날 예정인데 시가체로 가는 버스는 매일 새벽마다 있었다. 그치만 안그래도 우리와 노느라 계속 미뤄졌던 터였다. 물론 헤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여행루트를 억지로 바꾸는건 여행자들의 법칙이 아닌걸! 다카, 다시 한번 생각해봐. 응? 우리 언젠간 또 만날 수도 있잖아?

"아냐, 이건 내가 결정한거야. 난 너희랑 같이 있는게 즐겁고 행복해. 그러니까 내 뜻대로 결정하는 거야. 단 하루만 늘릴 거니까 내 계획에 크게 차질은 없어."
"다카, 정말 괜찮은 거야? 이러다가 언제 갈지 몰라-_-...."
"아냐, 하루만 미루고 모레는 꼭 갈거야.-_-"

그래서 다카는 하루 더 있게 되었다. -_-

새벽 2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하다. 조캉사원 앞에는 이 밤중에도 몇몇 티벳탄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괜히 마음이 경건해진다.

"엇, 오리온이다!"

서울과는 비교도 안되게 밝게 보이는 오리온자리. 삼태성때문에 금방 알아봤다.

"안녕 다카~~~"
"안녕~~"
"우리 거기서 만나~~~"

셋 다 오리온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진짜 다카는 옆에 있지만 언젠가 저기서 만날 미래의 다카를 향해서.



다음날. 어찌하다보니 다카가 하루 더 있게 됐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볼 곳은 다 가봤고, 마지막 날이니 뭔가 특별한 걸 해야겠는데 티벳에서 대체 뭘 한단 말인가. 요리라도 해주면 좋겠지만 할 수 있는 곳도 없고 장보는 것도 시원찮다.

돌고래 : "파티를 하는 건 어때?"
만물상 : "파티?"
돌고래 : "그냥 간단한 음식들 사놓고 우리끼리 하면 되지 않을까?"
만물상 : "오옷, 좋다! 근데 음식은 아무리 많이 사도 빈할거야. Bar에서 하자."
돌고래 : "그래, 케잌도 사고!"

그래서 하루종일 부산을 떨었다. 안그래도 우체국이니 민항사무소니 볼일이 많던 하루였는데 정말 헉헉대며 라싸시내를 돌아다녀서 겨우 케잌을 맞추고 얼굴을 익혀놓은 바텐더에게 미리 맡겨놓았다. 그리고 저녁무렵 Bar로 향했다.

돌고래 : "다카, 이건 우리가 사는 거야. 많이 먹어."
다카 : "뭐? 안돼. 벌써 너희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 그럼 안되지."
만물상 : "아냐, 걱정하지마. 우린 이제 여행이 끝나지만 넌 앞으로도 많이 남았잖아."
돌고래 : "그래. 환전한 돈도 많이 남았고 널 송별하는 자린데 이 정도야 괜찮지."

생전 안시켰던 커틀릿에 그릴새우, 피자, 튜나샐러드... 푸짐하게 시켜놓고 나니 기분이 좋다. 쏘는 김에 우리도 간만에 포식하는 셈이다. 한창 먹다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와 맡겨둔 케잌을 달라고 했다.
한창 불을 붙이고 어쩌고 하니 이목이 집중된다. 힘겹게 불을 붙이고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가니 다카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말... 정말 너희 잊지 못할 거야. 정말 너무... 너무 고마워."

고마워 할 건 우리다. 사실 친구라는 것이,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정말 마음 맞는 친구를 찾긴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먼 타지에서 다카를 만난 것 자체가 우린 정말 행운이었다.

예전에 와타루에게 티벳에 가는 이유를 destiny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와타루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카가 우리보고 '아무래도 너희를 만난 건 신의 계시인 것 같아. 우리 셋을 이 시기에 이곳으로 모이게 한 건 정말 destiny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와 돌고래는 그저 눈을 크게 뜨며 서로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다카, 정말 운명인지도 몰라.



(다카는 티벳을 떠난 뒤 네팔, 인도, 라오스 등을 여행했고 이듬해 여름 우리를 보러 한국에 왔다.)

'▶ nomad > '04 Tibe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벳] 18. 하늘에서 땅으로  (0) 2008.06.06
[티벳] 16. 에피소드 in 라싸  (0) 2008.06.06
[티벳] 15. 티벳을 여행한다는 것은  (0) 2008.06.06
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