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4. 23:34 ▶ nomad/'18 Japan

사쿠라지마의 첫 날. 당연하게도 아무 계획이 없었던 나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숙소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서 가져온 전단지에 귤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엄청 유명하다고 나와 있어 먹어보려 했더니 판매시간이 지났고, 걷다보니 도착한 비지터 센터에는 자잘한 소품 외 별다른 볼 것이 없었다. 자전거를 빌려 돌아볼까 했지만 반납시간이 30분도 남지 않아 패스.

 

그래도 딱히 실패했다는 느낌은 없었던 것이, 도쿄에 잠시 살러 갔을 때도 그랬지만 어딜 가든 내게 첫 날의 미션은 동네탐방이었기 때문이다. 돌아다니다보니 슬슬 배가 고파졌는데 숙소 레스토랑에서 관광객들 사이에 껴서 먹기는 싫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어디서 끼니를 때울까. 터미널 근처를 걷다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오래 전 중국 여행에서나 보던 밥 짓는 연기 같은 모습에 다가가니 정식이니 라멘이니 글자가 보인다. 그렇게 가게 된 곳이 아지도코로 츄우(味処 忠, 맛집 츄우)였다.

 

 

 

분명 장작 때는 연기는 자욱한데 기웃거려 봐도 사람은 보이질 않고 식당 안에 테이블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더니 안에서 다부진 몸에 누가 봐도 로컬 느낌 팍팍 풍기는 할아버지가 나오신다.

 

“혹시 식사 될까요?”

 

사람 소리를 듣고 한 아저씨가 더 나오는데 두 분이서 그냥 놀고 계셨던 모양이다. 화덕이라고 해야 할지 여튼 거대한 무언가 앞에는 정리되지 않은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고 할아버지는 그 앞의 넓은 나무판 위를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한다. 아무리 봐도 원래 손님 받는 테이블 용도가 아니다. 날도 저물지 않았고 그냥 밖에서 먹겠다고 하니 할아버지는 다행이라는 듯 얼른 나가 야외 테이블을 닦고 메뉴판을 가져다 주셨다.

 

“뭐가 맛있을까요?”

“라멘이 최고지. 치킨남방도 맛있는데 우리 딸이 만드는 거라 낮에만 먹을 수 있고 지금은 라멘만 돼.”

 

선택사항이 없는데요. 그래도 대표선수 격으로 보이긴 해서 라멘과 생맥을 시켰다. 그리고 할아버지께 감사했다. 그는 숨은 고수였다.

 

 

먹다가 찍었다

 

라멘만 한 30년 만들어온 것인가? (실제로 그랬다) 면 상태도 국물도 100점 만점에 120점. 물론 라멘 외 요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해질녘에 바다를 보며 먹는 라멘과 맥주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라멘을 흡입하는 처자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된 할아버지는 어차피 손님도 없겠다 내 말동무를 자처하셨다. 안에 같이 있던 아저씨는 할아버지 사위였다. 손녀는 가고시마에서 일하고(퇴근하고 오는 그녀와도 만났다) 점심 식사는 딸이 와서 도와주고... 이런 저런 사쿠라지마 토박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맥주를 추가한 내게 할아버지는 뭔지 모를 것을 서비스로 내어 주셨다.  돼지 귀, 내장, 혹은 닭똥집, 그런 식감의 것들을 잘게 다져 볶은 그야말로 안주. 일마치고 들렀던 이웃 아저씨도 잠시 등장했지만 살짝 술 취한 모습에 할아버지가 보내버렸다. 그 아저씨는 귀엽게도 아이스크림을 한 봉지 사서 돌아와 디저트로 먹으라며 안겨주었다. 할아버지는 “술 취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런 것 같네요.

 

 

 

 

 

그렇게 츄우는 내게 터키 셀축의 케밥하우스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오래 남는 여행의 기억은 항상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여행자도 좋고, 현지인도 좋고. 기대도 예상도 하지 못했던 만남에서 나누는 이야기,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 그렇게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 언제나 풍요로웠다. 삼일 내내 만난 츄우의 가족, 다음 날 화산의 흔적을 찾아가다 버스에서 만난 할아버지, 숙소에서 만나 왁자지껄 수다를 떤 키리시마 형제.. 이들은 본인이 뜨내기 관광객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다음 날은 본격적으로 아일랜드뷰를 타고 관광 스팟을 돌아봤지만 관광객 수십 명과 함께 우르르 내리고 타는 일정은 역시 큰 매력이 없었다. 그보단 점심 먹으러 츄우에 들렀던 시간이 즐거웠다. 4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이 아가씨가 그 한국인이냐며 반갑게 맞아주었고, 그녀의 치킨남방은 할아버지가 자랑할 만 했다.

 

 

 

일본 TV프로그램에서 카레남방이니 치킨남방이니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사실 지금도 남방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츄우의 치킨남방은 밥 위에 양배추와 순살 닭튀김, 소스를 얹은 것이었는데 정말 심상치 않게 맛있다. 일단 닭고기 질이 좋은 게 느껴지고, 튀긴 상태며 간이며 완벽하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는데 이걸 남겼다간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 같아 남길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또다시 한국에선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를 들이켰다.

 

묘하게 시끌벅적한 분위기 때문인지 은근슬쩍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왠지 모르게 의무를 느낀 내가 붙잡은 외국인팀만 여럿이었다. 자연스럽게 눈 맞추고 인사하며 “여기 좋아요”, “맛있어요” 하며 테이블에 앉히고 안쪽으로 “손님 왔어요!” 소릴 지르면 할아버지가 나온다. 바빠진 할아버지와 딸내미 대신 유모차에 있던 아기도 돌보고 하다 보니 나 지금 뭐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즐거웠다.

 

사쿠라지마를 떠나는 날 마지막 식사도 츄우였다. 가기 전까지 라멘과 치킨남방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했지만 센스있게도 츄우엔 세트 메뉴가 있다. 거기다 단골 특전으로 감자 샐러드까지 얻은 나는 다시 나마비-루(생맥)를 외쳤다. (한국에서는 내 돈주고 술을 마시는 일이 거의 없다. 정말이다.)

 

왜 이렇게 짧게 있다 가냐며 자꾸 다시 들리라고 하시는 할아버지와 사진도 찍고, 동네 사람들과 떠들다가, 지나가는 외국인들 부르다가, 다시 맥주 마시다가.. 하다 보니 시간은 잘도 흘렀다.

 

이젠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저 이제 갈게요!”
“지금 간다고? 이리 와봐.”

 

츄우는 공간을 나누어 한쪽에선 식사를 팔고 한쪽은 오미야게야(기념품점)로 쓰고 있었다. 뭐 가게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예전엔 나름 장사가 잘 됐다고 하는데 요새는 여기까지 와서 기념품을 사는 사람도 별로 없고, 밖에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할아버지께 간판 좀 바꿔 다셔야겠다고 말했다), 안에는 이게 다 뭔가 싶을 정도의 온갖 소품들이 가득 쌓인채 세월의 먼지를 이고 있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네? 아니요, 아니요. 진짜 괜찮아요.”
“내가 기념으로 주려고 그래. 한국 가서 다른 사람 선물로 줘도 되고. 골라봐, 골라봐.”

 

아 진짜 괜찮은데. 사실 오미야게를 판다는 걸 알고 전날 작은 액자를 하나 샀었다. 서글픈 시가 새겨진 작은 플라스틱 액자가 마음에 들어서 나도 추억으로 남기고 할아버지께 도움도 드리고 딱 됐다 했건만.

 

“아니 저, 진짜 괜찮아요. 이거 파는 거잖아요. 저 정말 괜찮아요.”
“아니야. 골라봐. 이거? 이건 어때? 이거?”
“아니 정말 괜찮은데...”
“마음에 드는 거 골라보세요~ 선물이에요!”

 

어느새 따라 들어온 따님도 옆에서 부추긴다. 아니 정말이지... 뭘 고르란 말인가.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나는 끝까지 괜찮다며 빼다가 대충 싼 것들을 훑어보았고, 그걸 보던 할아버지는 결론을 내리셨다.

 

“그거 말고 이거 어때? 좋지? 이걸로 하자!”

 

아니요!!!!

 

할아버지가 꺼내 드신 건 목각 인형이었다.
아니, 엄청난 크기의 그로테스크한 덩어리였다. 이걸 본 누구도 일본여행 기념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남태평양 섬나라에서 사왔다고 여길법한,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그 어떤 힘이 느껴지는 조각이었다. 심지어 남녀 한 쌍이다.

 

가격표를 보니 예상대로 값이 나가는 물건이다. 내가 최대한 싸고 작은 걸로 고르려 했던 건 단지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도대체 무슨 나무로 만든 건지 조각상은 크기에 어울리는 무게감을 자랑했다. 큰일이다. 이건 분명 오버차지의 견적. 캐리어의 엄청난 지분을 차지하게 된다.

 

“아뇨 아뇨! 이거 너무 비싸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내가 선물로 주는 건데.”

 

제가 괜찮지 않아요. 좋은 걸 주려는 할아버지께 무거워서 가져가기 싫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따님은 얼른 조각상을 받아 먼지를 닦고 비닐에 담아주셨다. 나는 이걸 들고 가방을 매고 캐리어를 끌고 다시 배를 타고 가고시마 시내로 나갈 생각에 아득해졌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나중에 꼭 다시 놀러올게요!”
“꼭 와야 돼. 나중에 오면 우리 집에 방 많으니까 여기서 자는 거 알지? 꼭 놀러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겠다며 찾아왔지만 떠나는 순간에는 나를 배웅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늘어난 짐을 이고 지고 걸어가며, 지금처럼 내 뒤에서 손을 흔들어준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 조금 서글퍼졌다.

 

 

 

 

 

 

 

 

 

 

 

바로 이것이다. 높이는 약 43cm. 실제로 봤을 때의 압도적 느낌이 사진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일체형 조각의 목에 걸려있는 일체형 고리를 보면 꽤 어려운 작업으로 탄생한 건 분명하다.

 

혹시 우리나라의 장승처럼 어느 정도 메이저한 조각인 걸까 싶어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해봤다.

 

 

 

 

..........

 

그래도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