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4. 00:29 ▶ nomad/'03 China

이 여행기를 쓰는 것이 2010년 3월, 여행을 했던 시기가 2003년 2월. 7년 전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적어도 여행을 떠났던 그 짧은 나날에 대한 감정은 명확하게 떠오른다. 인생 처음이었던 38리터 배낭의 무게, 인천여객터미널 주변의 그 황량한 풍경,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뛰었던 가슴.

 

무려 티벳여행을 가면서 보험 따위 당당하게 들지 않았던 시기에 비하면 이때의 우리는 참 어렸고 순수했다. 그 시절의 우리에 대해서는 출발하는 날 아침,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돌고래와 나눈 다음의 대화에서 잘 알 수 있다.

 

만물상 : 어, 귀걸이 했네? (돌고래가 링 모양의 금귀걸이 착용 중)

돌고래 : 응. 괜찮을까?

만물상 : 글쎄... 금붙이나 이런 거 위화감 주려나. 별 상관 없으려나?

돌고래 : 그냥 빼고 갈까? 괜히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만물상 : 그게 좋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결국 돌고래의 귀걸이는 배웅 나오셨던 돌고래 어머님 손에 안착했다. 우리는 이토록 순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영악하고 또 대담했던 우리들은 양쪽 집에 단체여행을 간다고 거짓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왠지 둘이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간다고 하면 절대 보내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인터넷에서 만난 십여 명의 언니오빠들과 함께 간다고 했고, 연락처를 미리 적어놓고 가라는 엄마의 말에 친구 번호 몇 개와 누군가의 번호일지 모를 숫자들을 나열해서 제출했다. 물론 이렇게 적어도 절대 전화를 할 리가 없다는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상당히 질이 안좋았다.

 

어쨌든 어정쩡한 2월의 역시 어정쩡한 어느 날 우리는 배낭을 메고 인천여객터미널로 향했다. 하늘도 어정쩡해서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미묘한 날씨였지만 우리는 나름 미지의 세계로 드디어 함께 떠난다는 설레임 속에 흥분해있었다(누차 말하지만 둘의 분위기만으로는 거의 아프리카 오지로 떠나는 수준이었으므로). 보따리 장수들이 태반인 여객터미널에서 누가 봐도 '우린 배낭여행자요' 하는 차림으로 출항을 기다리는 것은 미묘한 우월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다. 우월감이었다. 놀러간다는 우월감.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당시 보따리 장수의 짐을 대신 통과시켜주고 얼마의 용돈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어리버리하게 보이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접근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저씨의 달변에 넘어가버려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는데 4인실용이었던 우리의 표를 보더니 직원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미처 따라가진 못하고 매의 눈으로 보고 있자니 다른 표로 바꿔와 건네주는데 바로 2인실 스위트룸의 티켓. 그렇다. 그는 실세였던 것이다.

 

드디어 승선할 시간이 되어 우리 방을 찾아가니 무려 스위트룸 중에서도 가장 중간방이다. 창문으로 뱃머리가 보이는- 여객선 전체에서 가장 앞, 가장 중간에 위치한 방인 것이다. 티테이블과 의자, 텔레비전,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딱딱해보이는 2층 침대 두 개 뿐인 방에 공동욕실을 써야하는 4인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 방까지 찾아와 불편함이 없는지 체크해주고 돌아가는 아저씨의 모습은 흡사 우리가 패키지여행을 왔던가 착각할만한 수준이었다.

 

승선한지 1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배가 출발했다. 아니 1시간 동안 출발했다. 여객선 여행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출항과 정박에는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사실 출항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출발!'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게 어정쩡했던 여행에 어울리는 시작이었다.

 

 

배는 생각보다 컸고, 외국인이라곤 한 명도 없었고, 갑판에 나와 타이타닉을 흉내내는 사람도 없었고, 우린 멀미를 시작했다. 토하지는 않았지만 도대체 어지러워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잠시 눈을 붙인 뒤에 멀미는 가라앉았고 우리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갑판에 나와 밤바다를 구경했다.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늘도 까맣고, 바다도 까맣고, 그나마 날이 흐려서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를 헤치고 나아간다는 기분만은, 그 묘하게 두렵고 설레였던 기분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을 못자는 것을 가장 이해못하는 나는 언제나처럼 숙면을 취했고 아침은 금방 찾아왔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다를 보기 위해 얼른 씻고 아침을 먹은 뒤 갑판으로 나오니 뱃길을 따라 떼지어 날아오는 물새가 정겹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수평선 저편에서 신기루처럼 대륙이 나타났다.

 

중국이었다.



posted by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