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11 Turkey

[터키] 3. 탈출하는 여자들

만물상 2012. 1. 5. 11:59

사실 떠나기 직전까지 터키 여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세워놓은 계획은 없었다. 혼자 가겠다 무턱대고 결정해놓고 준비한 거라곤 도서관에서 빌린 2007년판 <세계를 간다-지중해편>과 첫 날 숙소 예약이 전부. 터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내 머릿속 이미지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고, 여유롭게 터키를 느끼고 또 나를 느끼는 시간이 되길 바랬기에 딱히 관광지에 갈 생각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기간이 짧아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쉴 생각도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쓴 다이어리에 ‘나 지금 터키에 날아가고 있다, 말도 안 된다, 나 중동 간다, 그 이스탄불에 나 혼자 간다’ 따위가 즐비한 걸 보면 그냥 가는 자체만으로 심히 흥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창 밖으로 보이기 시작한 아나톨리아 땅은 내 맥박을 요동치게 했다. 심장병 걸린 환자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지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 터키 땅을 밟긴 밟는구나, 뭐 이런 종류의 신기함도 있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총알같이 튀어나가 제일 먼저 짐 찾는 곳까지 왔는데 바로 옆에 온몸으로 ‘여긴 중동땅이니라’ 외치는 듯한 단체팀이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흰 옷에 흰 터번을 썼고 여자들은 새카만 차도르로 온 몸을 감고 있다.

그 생경한 모습에 잔뜩 흥분해서 터키 첫 도촬을 시도했다. 자연스럽게 의자에 걸터앉아 카메라를 무릎에 올려놓고 조준한 뒤 조심스럽게 클릭. 실은 이들 중 내 모습을 포착한 누군가가 전혀 모르는 언어로 마구 삿대질하며 욕하고 그걸 들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동쪽 끝에서 날아온 이교도 여자를 처단하는 게 아닐까- 하는 무시무시한 상상에 조금 떨렸다. 무턱대고 이렇게 사진(특히 여자들)을 찍는 게 그들의 문화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공항 한 켠에서 기도 중. 메카의 방향을 어떻게 아는 거지?


어쨌든 이 이질적인 풍경에 대한 흥분과 경외는 화장실에서 누그러졌다. 짐이 늦게 나오길래 기다리다 화장실에 갔는데, 세상에,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마비시키는 그 냄새라니… 이국적 향취로 내 눈을 반짝이게 했던 그 여자들이 화장실에서 너도 나도 차도르를 벗고 땀을 식히고 간단히 몸을 씻고 있었는데 엄청난 냄새가 일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순간 이들에게 실례가 되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코를 틀어막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최대한 여유롭게 행동했다.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았지만 도저히 오래 있을 용기는 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듯, 원래 목적이 그랬던듯 손만 얼른 씻고 나왔다. 아, 정말 문화란 다양하고 현실은 잔혹하지 않은가.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술탄아흐멧까지 메트로와 트램을 타고 찾아오는 길은 순조로웠다. 첫 날 숙소는 한국인의 메카 동양호텔의 도미토리. 사실 여러 의미에서 한국 숙소를 가는 게 좀 꺼려지긴 했지만 자세히 알아볼 시간도 없었고, 어차피 무계획이었던 터라 일단 도착해서 우왕좌왕하지 않게 하루만 해놓고 그 뒤는 차차 생각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동양호텔은 외국인도 적지 않게 묵는(물론 도미토리 제외) 말 그대로 ‘호텔’이었고, 잠시 동안이지만 꽤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 숙소에 대한 편견도 깨졌다. 이스탄불에서의 일일 트래블메이트 C양과 L양도 이곳에서 만났다.

로비에서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알게 된 C양은 힘들게 휴가 내서 날아온 것도, 타고 온 비행기도, 이튿날부터 계획이 미정이라는 것도, 심지어 나이도 같아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혀 여행자답지 않은 자켓과 플랫슈즈 차림으로 모두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L양은 프라하에 살고 있어 우리가 일본이나 동남아가듯이 주말을 끼고 놀러 온 상큼발랄한 동생이었다.

나 빼고는 워낙 쾌활한 성격들이기도 했고 첫 만남이라고 해서 쭈뼛거릴 나이는 지났으니 친해지기는 쉬웠다. 셋 다 사회인이라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에서의 한 끼에 우물쭈물 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전반적인 행동에 있어 아무래도 어릴 때보다는 여유가 있는 게 사실이었다. 모든 게 즐거울 수만은 없는 도시 사람들이라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같은 날 이스탄불에 떨어진 한국여자 셋은 의기투합해서 술탄아흐멧 주변 탐방을 함께 했고 꽤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터키 맥주 에페스로 여행을 자축했다.



밤에는 숙소에서 조촐한 맥주 파티가 있었다. 사업차 터키에 자주 오는 40대 남자 세 분이 타국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것에 고무되어 가볍게 한 턱 쏜 것이다.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셋 말고도 몇 명의 여자들까지 전부 혼자 온 여행자들이라는 게 화두에 올랐다. 아저씨는 “대체 한국 여자들 왜 이리 당차졌냐,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며 놀라워하고 또 의아스러워 했다.

실상 오랜만에 여행자들과 마주한 나 역시 놀랐다. 탈출하기가 쉬워진 만큼 탈출하고 싶어진 여자들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공항에서 본 여자들과 분명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우리들은 그만큼 도전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전통에 얽힌 그들처럼 현실에 얽혀 있었다. 차도르 속의 그 여자들이 언젠가 전통이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 탈출을 감행할 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 출구가 또 다른 입구일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쳐도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