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11 Turkey
[터키] 2. 여행자의 준비물
만물상
2012. 1. 5. 11:59
인생 첫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내겐 이미 완벽한 준비물 리스트가 있었다.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여행에 관한 자료라면 뭐든 수집했던 10대 시절, 나름 알려진 여행가들의 준비물 리스트를 모조리 취합해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서 내게 딱 맞는 리스트를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이 리스트는 효용가치가 떨어진다(라기보다 아예 없다). 워크맨용 건전지나 필름 수 십 통을 사들고 가야 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느냔 말이다. 고추장이나 라면스프를 준비할 정도로 한국 음식이 그립지도 않고. 배낭을 둘러싸는 철망이나 체인을 가져가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엔 가지도 않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곳에서 입고 버릴 낡아빠진 옷을 가져가 그나마도 리폼해서 입긴 싫다. 각종 충전기와 저장장치가 추가되었고, 스킨로션 하나였던 화장품 목록이 늘어났다.
여기까지가 여행준비물에 대한 짧은 기억이고, 이번 여행에서 느낀 조금 정보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근데 심히 주관적이라 무시해도 좋다.
<가져가서 예상보다 좋았던 것들>
콤팩트 카메라
일명 똑딱이라 불리는 소형 카메라. DSLR을 가져가기 때문에 굳이 카메라를 두 개씩이나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그런데 왠걸, 똑딱이를 가져간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기동성을 위해 케이스 벗겨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니(액정은 다 까졌지만) 순간포착에 용이했고, 누구나 쉽게 찍을 수 있으니 사진을 부탁하기 편했고(내 사진을 남겨야 한다는 걸 생각 못했다), 무엇보다... 이게 없으면 도촬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도촬을 좋아한다는 것, 여행사진에는 도촬이 필수불가결이라는 것을 깜박하지 않았더라면 떠나기 전에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담배
터키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는 건 다 아는 사실. 여자일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터키 남자의 경우 적당히 선물로 주기 좋았다. 잘 생겼지만 싸가지 없었던 호텔 앤티크의 청년에게도, 셀축의 친구들에게도 담배를 줬는데 심하게 좋아했더랬다. 다만 던힐을 한국 담배로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게 조금 난감할 뿐.
스카프
떠나는 날 아침. 짐을 다 싸고 옷을 입고 배낭을 둘러멨다.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쓰윽 방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한 켠에 걸려있는 스카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2초 고민하다 품과 길이가 넉넉한 것으로 하나 빼서 배낭 귀퉁이에 쑤셔 넣었는데 이렇게 잘 쓰일 줄은 몰랐다. 일단 외국인 여성도 스카프를 착용해야 하는 일부 모스크에서 누가 썼는지 모를 천 조각을 얼굴에 덮어쓸 필요가 없었다(그러니까 그런 모스크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떠났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숄로 쓰기도 했고 조금 화려한 무늬다 보니 슬쩍 멋 부리고 싶을 때도 용이했다.
상비약
여행을 몇 번 다니다 보니 준비물 리스트에서 이상하게 홀대하게 되는 것이 상비약이었다. 딱히 아픈 적이 없었으니 매번 고대로 남겨오는 약들이 괜히 짐만 된다고 생각해 제대로 챙기지 않게 된 것인데, 이번 여행은 나름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컨셉이었던지라 평소와는 다르게 착실히 챙겼다. 그리고 그 약들, 종류별로 반 이상 다 쓰고 왔다. 남겨두었던 감기약도 돌아오는 날 몸살에 된통 걸려 비행기 안에서까지 잘 복용했다. 그래서 깨달은 것. 역시 준비는 중요하다. 몸에 관련된 건 필요없다 생각말고 잘 챙기자.
<없어도 괜찮지만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들>
목베개&안대
오래 전 작성해두었던 리스트에는 분명히 존재했는데, 귀찮기도 하고 ‘꼭’ 필요한 건 아니라 어느 새 무시한 것들. 둘 다 비행기보다는 야간버스를 탔을 때 아쉬웠다(사실 목베개는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앞에 앉은 미국 남자애 목에 걸쳐진 걸 뺏어 오고 싶을 만큼 강력히 원했다). 부피도 무게도 별로 안 나가는데 다음 여행에선 기필코 챙기리라.
맥시드레스
남자들은 모를 수 있는데 그냥 긴 원피스로 생각하면 된다. 예상치 않게 셀축에 가게 됐는데, 예상대로 썰렁한 이스탄불과 달리 어찌나 덥던지 말이다. 반바지도 없어서 땡볕에 헉헉대다가 결국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사버렸다(이 부분은 여행기에서 자세히). 근데 원래 맥시가 여행지에서 무지 좋은 아이템이라 후회는 안 했다. 치마니까 당연히 바지보다 편하고, 길이가 기니까 신경도 안 쓰이고, 상하의 따로 안 챙겨 입어도 되고, 썰렁하면 카디건 하나 입으면 되고. 물 빠짐 없고 바느질 좋은 걸로 고르느라 비싼 돈 주고 샀는데 그럴 바에야 한국에서 준비하는 게 좋을듯.
명함
역시 오래 전 리스트에는 존재했던 것이다. 회사에서 만들어 주는 업무용 말고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날 수 있는 개인 명함을 말한다. 보통 직업(회사가 아님), 휴대폰 번호, 웹사이트나 페이스북 등이 있고 사진을 넣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행자들끼리 주고 받는 경우도 많지만 이번 여행에서 유독 생각했던 건 가는 가게마다 명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간 곳들만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나중엔 뭔가 수집의 의미가 되어버려서 내 쪽에서 요청한 경우도 많았다. 사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지라 명함은 증거로 남기기에 딱이었다.
손전등
티벳 여행을 할 때 라싸에서 매일 가던 식당이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내밀다 보니 주인 아줌마와 친해져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생긴 곳인데, 어느 날 밤 그 일대의 전기가 나가버려 촛불을 켜놓고 논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은 정말 어쩌다 한 번 생기기도 쉽지 않은데 터키 여행에서도 그랬다. 멀쩡한 숙소의 전원이 나가 세수도 제대로 못 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실은 이 경험을 교훈 삼아 이번 여름 중국에 가면서 자가발전식 손전등을 가져갔는데 망가질 정도로 잘 썼다. 불빛이 필요할 땐 휴대폰을 쓰는 시대가 왔지만 역시 손전등은 아직 유효하다. 참고로 손전등 역시 예전 리스트에 있었다.
BGM
‘영화와 현실이 다른 것은 배경음악의 존재 여부이다.’ 라고 누군가 그랬는지 내가 지어냈는지 진위여부는 명확치 않지만, 사실적인 표현의 독립영화에는 배경음악이 적고 대중성 강한 영화에는 배경음악 없는 씬이 드물다는 걸 떠올려보면 어쨌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귀에서 이어폰을 안 떼는 체질이기도 해서 여행을 갈 때마다 챙기는 것이 배경음악인데 아무래도 여행하는 국가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뉴욕에서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줄창 들었고 중국에서는 등려군과 장국영을 빼놓을 수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땐 Foundations의 ‘Build me up buttercup’이 대세였다(mp3가 흔치 않던 시절까지는 그냥 들었는데 이젠 이착륙 시 mp3도 끄게 되어 있어 못 들음). 러시아에서는 클래식을 많이 들었고 일본은 같은 계절에 방영된 드라마 OST를 꼭 챙겼다. 배경음악은 현지에서 여행의 향취를 더욱 진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상에 복귀한 이후 여행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때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 내가 터키를 위한 BGM을 전혀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엄청난 미스라니.
수면제
뭐... 이걸 꼭 써야 되는 지, 쓴다고 다음 번에 챙길 지 모르겠는데 어찌됐건 이번 여행에선 참으로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