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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

만물상 2008. 8. 16. 02:03

대학교 3학년 때던가. 휴학생활을 끝내고 복학했던 그 해에 겨우 깨달았다.

나라는 인간, 여름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_-

학생 때는 으례 방학의 시작과 함께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곤 하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여름에 세운 계획을 지킨 적이 없었다.
공부 계획을 지키지 못하고 놀기만 했다, 이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여름 내내 아무 것도 못했다는 얘기.
매해 여름을 중증 이상의 히키코모리처럼 아무런 의욕없이 보냈다는 걸
학생 신분으로 십수년을 살아온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여름에는 가급적 계획을 세우지 않거나 최소한만 세워왔고,
아니나 다를까 그나마도 지키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늘어진 채 KO패를 당했다.
그리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바로 오늘 깨달았다.

비가 많이 왔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지금까지와 달라진 공기의 냄새.
그 냄새를 맡고, 뭐라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순간 팟- 하면서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고 해봤자 더 이상하겠지만. 뭐랄까, 잠시 빠져있던 나사가 다시 제자리에 끼워진 느낌이랄까.
마치 긴 잠을 자고 깨어난 것처럼 이전과 확연히 다른 내 몸과 정신이 느껴졌다.
여름이라는 게 어느 한 순간 시작되는 게 아니니까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인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여름이 되기 전의 내 페이스를 되찾았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신기하지. 어제 느낀 그저께는 분명 하루의 차이였는데, 오늘 느끼는 어제는 꿈결처럼 아득.
이렇게 또 한 번의 여름이 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