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08 USA: New York

[뉴욕] 장거리 비행에 관한 이야기

만물상 2008. 6. 9. 03:40


공항도로를 타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던 시기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흥분이 사라져서 좀 아쉬웠는데, 떠나기 전날까지도 아무렇지 않더니 막상 공항에 도착하자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짜 뉴욕으로 가는구나.

창가자리로 이미 좌석배정을 해놓은 상태였지만 혹시 만석이라면 통로쪽으로 바꾸려고 물어봤더니 내 옆자리는 비었고 통로쪽 좌석은 예약이 돼있단다. 옆자리가 비었다면 괜찮겠지 싶어서 그대로 해달라고 했다.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도 들리고 일찍 게이트 앞으로 왔다. 미처 연락하지 못한 지인 몇몇에게 전화를 했는데, 지금 공항이라고 했더니 다들 하는 말이 똑같다. "뭐? 공항? 가는 날 연락하냐?" "근데 진짜 부럽다."

저녁 비행기는 처음이라 묘한 기분으로 밖을 보다가 문득 이번 여행에 동행하는 녀석이 생각났다. 바로 앤 셜리양. 지금은 좀 바뀌었지만 예전엔 나와 돌고래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빨강머리 앤>의 앤과 다이애나였다. 10대 때의 나는 앤처럼 공상을 곧잘 하고 좀 종잡기 힘든 편이었다. 반대로 돌고래는 약간 소극적이고 얌전하고, 나(앤)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이해해주고 때론 같이 하는 딱 다이애나의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던 앤과 다이애나의 피규어 중 다이애나를 돌고래에게 주었는데 미국에 갈 때 데려갔다고 해서, 우리도 만나는데 얘들도 만나게 해 주어야 될 것 같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여행 가방을 옆에 두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발을 주무르는 앤의 모습은 여행 다니던 중간중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앤의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동안 탑승할 시간이 다가왔다.



도착시간이 저녁 8시쯤이라 빠른 시차적응을 위해 바로 자야될 것 같아서, 일부러 비행기에서 안 자려고 책을 챙겨왔다. 그 중엔 <뉴욕 3부작>도 있었는데 사기는 예전에 사놓고 뉴욕갈 때 읽겠다고 책꽂이에 꽂아둔 책이다. 드디어 제 역할을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나중 얘기지만 뉴욕에 한창 머무를 때 읽으니 책에 나오는 지명이나 거리가 머리속에 펼쳐져서 아, 역시 가져오길 잘했군 생각했다. 비록 가방은 무거웠지만.

저녁을 먹고 하나둘씩 잠이 드는 가운데 책을 꺼내 읽었다. 거의 유일하게 불을 켜놔서 그런가 승무원들이 흘깃 흘깃 보고 가는 게 느껴진다. 읽다보니 입이 심심해서 맥주를 달라고 했는데, 아까 마신 와인은 별로더니 맥주는 목이 말라서 그런가 맛있게 잘 마셨다.






역시 가볍고 작아서 자주 애용하는 시공사의 책은 뉴욕 역사를 훑어보려고 샀는데 그냥저냥 볼만했다. 사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다이제스트 지식 쌓기는 좋지만 문장력이 좀 별로라는 느낌이다.

개인모니터로 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티비 프로그램과 음악, 뒤로 넘기면 등받이가 넘어가는 게 아니라 앉은 부분이 앞으로 오는 의자, 게임기 역할도 하는 리모콘. 여러모로 설비가 훌륭해서 이만하면 장거리 비행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장거리 비행기는 다 이런 줄 알았다가 돌아올 때는 낭패를 봤다. 모니터로 놀다보면 시간이 가겠지 싶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복도에 모니터가 하나 달리고 좌석도 후진- 내가 지금까지 탔던 기종이었던 거다. 덕분에 어찌나 잠을 많이 잤는지.

그래도 즐거웠다. 예전에 탔던 모스크바행 비행기는 중간에 앉은 데다 난기류가 너무 심해서 장거리고 뭐고 의미를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오죽했으면 착륙 직후 사람들이 박수를 쳤을까) 이번엔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을 보며 장거리 비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었다. 태양빛이 강해서 계속 블라인드를 올리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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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기했다. 주홍빛 햇살이 창의 오른쪽을 물들이더니 어느샌가 방향이 바껴 왼쪽을 물들인다. 몇 시간만에 해가 뜨고 지는 걸 볼 수 있다니, 지구가 정말 돌고 있구나. 예전에 유럽에서 경험한 백야현상보다 훨씬 신기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의미있었던 건 이것.






캄캄한 창밖을 찍은 이유는 바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저 아래가 태평양이기 때문이다. 태평양을 건넌 건 처음이었으니까 기록할 만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진입한 후에도 내 발밑의 세상을 상상하고 그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를 떠올리는 게 재밌어서, 비행 내내 영화나 쇼프로그램보다는 경로를 보여주는 이 화면을 주로 봤다.



하지만 장거리 비행이라고 무조건 흥미로웠던 건 아니다. 예비지식이 부족해서 고생도 꽤 했는데, 실패를 발판삼아 돌아올 때는 좀 편하게 왔다. 이때의 경험으로 알게 된 장거리 비행의 팁 몇 가지.

1. 좌석
가장 좋은 건 옆 좌석이 죄다 비어있는 창가자리. 장거리 비행에서 창가자리가 인기없는 이유는 당연히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인데, 옆이 비어있다면 구석의 안락함도 넓은 공간의 편안함도 누릴 수 있다. 일부러 요청해도 쉽지 않은데, 의외로 좌석운이 좋은 나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 행운을 누렸다.
이게 불가능하다면 역시 마음대로 다리도 펴고 일어설 수도 있는 맨 앞줄의 구석이 좋다. 비행기 종류에 따라 바깥 풍경은 포기해야 되는 경우도 있고, 겔리 옆이라면 좀 시끄러운 게 흠. 몸이 찌뿌둥한 사람들이 좌석 앞의 빈 공간에 모여드는 경우도 있다. 중간 줄의 맨 앞 좌석은 유아를 위한 바구니가 준비되기 때문에 아이를 안고 타는 경우가 많으니 요주의. 참고로 나는 일단 무조건 비행기의 앞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뒤편은 기내 공기의 순환이 잘 안되고 만석일 경우 인구밀도도 높아서 답답하다.

2. 신발
겨울이다보니 부츠를 신고 비행기에 탔는데 진짜 고생했다.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발이 어찌나 부었는지 아예 들어가질 않는 거다. 나중엔 비행기에서 주는 양말만 신고 돌아다녔는데 내릴 때가 됐는데도 발의 붓기가 안빠져서, 스웨이드 재질의 부츠를 거의 찢을 듯이 당겨 겨우 발에 끼웠다. 끝까지 안들어갔으면 기내용 양말을 신고 내릴 뻔. 편한 스니커즈와 기내용 슬리퍼는 필수라고 생각된다.

3. 워터스프레이 & 클렌징 티슈
남자들은 잘 모르겠는데 여자들에겐 필수품이 아닐까. 이륙한지 몇 시간이 지나고 얼굴이 좀 당긴다는 생각은 했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쩍쩍 갈라진 피부에 엄청난 각질이 일어나 있어서 그야말로 몬스터. 건조함은 점점 심해져서 얼굴이 텁텁하고 가려울 정도가 되었다. 프레쉬Fresh의 워터스프레이는 기내용으로 쓸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케이스가 추가로 있다던데 괜찮은 듯.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화장을 하고 있는 여자들에겐 클렌징 티슈도 필수다. 기내에서 줄창 잘 생각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미국행 비행기에서는 워터스프레이 지참 불가능...)

4. 모자
개인적으로 이건 진짜 중요한 필수품인데... 머리에
유분이 많은 나는 하루만 머리를 감지 않아도 엄청난 상태가 된다. 착륙 직전, 기름기에 갈라진 앞머리를 보니 어찌나 좌절스럽던지. 돌아올 때는 니트모자를 챙겨서 착륙 전부터 푹 눌러쓰고 들어왔다.

일단 생각나는 건 이 정도. 역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비행이었다.



이런 저런 경험들을 하고 있으니 어느 새 뉴욕이었다. 뭔가 비행기가 같은 자리를 맴도는 느낌이라 화면을 보니 비행경로가 계속 같은 원을 그리고 있다. JFK에 착륙하는 비행기가 많아서 상공에서 기다리는 중이라는 기장의 방송이 나왔다.

그러길 20여분 만에 드디어 착륙했다. 생전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는구나. 입국심사대에서 줄을 세우는 직원들이나 저 너머로 보이는 청소원들, 경비들, 인종이 각양각색이다. 정말 뉴욕에 왔구나 싶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사람들이 한창 서있는데 갑자기 시계를 보더니 자기 짐과 음료수 병 등을 챙겨서 부스를 나오는 심사대의 한 직원. 오래 전에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본, 서양사람들은 근무시간 칼같이 지킨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드디어 내 차례. 다른 사람들은 대강 보내더니 나한테는 이것 저것 묻는다. 전에도 몇 번 그랬는데 입국심사대에서 나는 유독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수상하게 여겨서 꼬치꼬치 캐묻는 건 아닌데 이런 저런 말을 시킨다. 내가 만만하게 생겼나. 그때만해도 일정을 늘릴 줄 모르고 출국일을 열흘 뒤로 얘기했는데, 설마 그렇다고 열흘짜리 도장을 찍어준 건 아닌가 불안했지만 다행히 6개월짜리였다.

짐을 찾고 나오니 출국장에는 사람들이 한 가득이다. 재빠르게 눈을 훑으니 저 너머의 돌고래가 보인다.

"돌고래!"
"만물사앙~!"

늦은 시간에 공항까지 나와준 돌고래가 고마웠다. 밖으로 나오니 뉴욕의 공기를 맛볼 새도 없이 엄청난 겨울바람이 내 얼굴을 때린다. 장난이 아니었다. 돌고래 말로는 내가 도착한 날부터 추위가 심해졌다는데 솔직히 뉴욕의 겨울은 한국보다 훨씬 춥다. 지친 나를 위한 돌고래의 배려로 밴을 잡아탔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새도 없이 차창 밖으로 맨해튼이 보였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야경도, 오랜 친구와의 재회도 감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