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7. 아사쿠사에서의 잘못된 만남 下
멀리서 남자가 손을 흔든다. 아직 몇 분 남았는데, 꽤 일찍 왔나보다.
날 보자마자 내가 약속시간을 지켜서 기쁘단다. 아니 약속시간은 당연히 지키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약속이지. 의아해했더니 자기가 그동안 만난 사람들(한국인을 얘기했는지 여자를 얘기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은 항상 조금씩 늦었다나.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약속시간에 늦는 것, 그러니까 상대방이 늦어서 내가 기다리게 되는 걸 정말로 싫어한다. 물론 나라고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11시 57분 쯤에 멀리서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짜증이 난다. 적어도 2~3분 전에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여야 12시라는 약속시간에 맞출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쨌든 내가 시간맞춰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한 모습. 영어가 유창하다 싶더니 중동계 캐나다인이다. 호텔프론트나 식당에서밖에 입을 열 일이 없다가 간만에 일행이 생기니 왠일인지 영어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온다. 느낌이 좋군.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라고 생각한 게 한 10분은 갔으려나...
바로 이 순간이 지옥같은 시간의 서막이었다고는 그땐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엔 워낙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서 눈치챌 수가 없었다. 사실 카메라에 대해 얘기할 때부터 아름답다는 둥 친절하다는 둥 엄청나게 띄워주긴 했지만 워낙 오랜만의 외국인이라 별 생각없이 넘어갔는데, 아뿔싸. 같이 다닌지 1시간도 되지 않아 그의 제안에 OK했던 내 주둥아리를 꼬매버리고 싶어졌다.
점점 스킨쉽도 잦아지고 무엇보다 립서비스가 장난이 아닌데, 무슨 외국에서 운명적인 사랑이라도 만난양 오바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직감적으로 인연이라는 걸 알았고 너와 내가 통하는 것 같고... 뭐라는 거니...-_-
나도 처음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사실 국적이나 인종이 문제되는 건 아니었다. 그치만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들이대는 것 하며, 무엇보다... 나이가 너무 많아!!!!! 물론 중동사람의 연령대를 짐작하긴 어렵지만...
내 눈엔 좋게 봐도 40대...ㅠ_ㅠ
처음부터 의심없이 호의를 받아들인 건 작업을 생각할 수도 없었던 '아저씨'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만났던 나이 많은 외국인들이 안 그랬기에 이번에도 편하게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거기다, 아무리 남자복 없는 인생이라지만 디카프리오나 탐크루즈는 아니어도 이런 아저씨는 정말 아니잖아...
계속해서 사탕발림을 늘어놓으며 애인이 된 것처럼 굴더니 결국 하는 말이 캐나다에 오라는 것. 그러면서 안심을 시키기 위해서인지 자기가 서울에 가면 꼭 가이드를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묻는 말이.
"근데 혼자 살아?" (역시 수틀리면 반말해석)
...묻는 의도가 무에냐. -_-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 한국에선 결혼하기 전엔 대부분 그래."
"그렇군. 난 너의 입장을 이해해. (무엇을?) 서울에 가도 너의 집에 머물 수 없겠지."
당연한 걸 가지고. -_-
"그런데 넌 외국인 남자와 만나는 걸 어떻게 생각해?"
"뭐 국적은 크게 상관은 없지만...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네."
적당히 넘기기 위해 대답했더니 이걸 가지고 엄청난 설득이 이어진다.
'물론 너의 부모님은 너를 사랑하시지만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고 너의 인생을 사는 건 니 자신이지 부모님이 아니며 결정은 니가 해야한다'는 얘기를 수십번 반복한다. 아... 점점 한계로 치닫고 있다.-_-
그러고는 캐나다에 오면 멋진 비치에서 놀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자기 아파트에서 머물면 되기 때문에 체류비는 전혀 들지 않을 거란다. 자기는 아파트에 혼자 살기 때문에 단둘이 지내며 'fantastic'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나.
...내가 왜 니놈 아파트에서 자냐...-_-
이래가지곤 안되겠다 싶었다. 대화도 대화지만, 함께 다니면서 혼자 다녔더라면 안해도 됐을 고생을 너무 한 터라 좀 더 같이 있다간 폭발할 것 같다. 결국 저녁약속이 있는데(이건 실제로 그랬다) 그 전에 개인적인 볼일을 봐야하니 그만 헤어지자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빤한 거짓말을 하면 재깍 알아들을 줄 알았지만.
"약속 이후에는 뭐하는데?"
"저녁약속이니까 '매우' 늦을 거야."
"그럼 밤에는 뭐하는데?"
"너무 늦으니까 호텔로 바로 가야지."
"그럼 내일은 뭐하는데?"
이자식이...-_-
"어쩌나, 내일은 교토에 갈 거라서 못 보겠네. 오늘이 도쿄에서 마지막 날이야."
움핫핫! 이건 핑계가 아니라 원래의 일정이었다. 어차피 아웃을 칸사이에서 해야 했기에 교토에 좀 있다가 한국으로 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가 엄청나게 기뻐하며 말한다.
"교토? 우왓, 잘 됐다~! 나도 내일 교토에 가는데!!"
...뭐라고???
이런 젠장할............
교토 안 그래도 작은 도시라던데... 더군다나 외국인들 가는 곳은 뻔하잖아!
숙소를 정했냐길래 덜컥 겁이나서 아직 못 정했다고 했더니 자기 숙소의 팜플렛까지 주며 몇 시에 로비에서 만나잔다. 이런 낭패가... 정확한 약속은 못하겠다고 둘러댔지만 이미 주머니 속에선 팜플렛을 구기고 있다.
그러고나서 헤어질 때까지 캐나다 오라는 꼬드김을 백번도 더 들은 것 같다. 막판에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30분 넘게 민망스런 생쇼까지 하고 겨우겨우 헤어진 뒤, 나는 부랴부랴 JR 매표소로 달려갔다.
"이 교토행 신칸센 티켓 바꿔주세요!"
결국 교토에 가지 않고 도쿄에 눌러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얘기... -_-
그 뒤 받은 그의 첫 메일에는 교토에서의 아쉬움, 감정고백, 그리고 예상대로 캐나다로 오라는 얘기가 있었다.-_- 나는 답장에 '일본에서는 친구를 만나 도쿄에서의 일정을 늘렸다. 미안타'는 내용과 더불어 '나는 너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자꾸 그런 식으로 대하면 계속 연락할 수 없다'고 썼다.
특히 이 부분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선을 긋는 표현을 위해 영어를 잘하는 돌고래에게 따로 부탁까지 해서 써보냈다.
근데 문제는... 이 빙시같은 놈이 '예의'만 알아 듣고 '확실한 선'은 못 알아들었다는 것...=_=
그 뒤로 지금까지 수개월동안 잊을만하면 메일이 오고 있는 것이다. 내 답장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하고('나는 니가 polite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며 압박을 주기도 했다-_-;) 끊임없이 캐나다에 오라는 소리만 반복하고 있다.
처음엔 그냥 무시하면 연락이 끊길 줄 알았는데... 연락하기는 싫지만 그냥 두기에는 너무 찜찜하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 절실히 느끼는 것이 '사람은 언제 어디서 엮일지 모른다'는 건데, 요즘처럼 글로벌한 시대에는 외국인이라고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_-
무엇보다 내겐 그의 사진이 없지만 그는 내 사진을 갖고 있다.;; 처음에 아사쿠사 앞에서 얘기할 때, 사진을 찍겠다길래 같이 찍자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내 독사진을 찍겠다는 거다. 사진찍히는 걸 정말 싫어하지만 딱히 거절할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좀 특이하다고만 생각하고 별생각없이 놔뒀었다.
사실 이 사진을 잊고 있었는데, 두달 전 쯤의 메일에 그때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걸 보고 얼마나 소름끼치게 놀랐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_-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떠올리기만 하면 뒷목이 뻐근해지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