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07 Japan

[일본] 3. 신선놀음

만물상 2008. 6. 6. 22:29



일본으로 떠나기 며칠 전 한 선배에게 전화가 왔었다. 센다이는 어떻다더라, 가면 어디어디를 봐라, 뭐가 유명하다더라, 호텔은 어디가 괜찮다더라. 여행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선배가 말하는 걸 주섬주섬 적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도 괜찮댄다. 일본의 3대 절경이래."
"에... 뭐요?"
"@#%$"
"네...? 마치시...? 마씨시마...? 뭐라구요? -_-"

그리고 홀라당 센다이에 떨어진 지금, 가이드북에서 발견했다.
(결국 다이어리에는 마치시마라고 적힘)



마쓰시마!
(松島. 미야지마, 아마노하시다테와 함께 일본 3대 절경의 하나로 뽑힌다. ...고 한다.)



이거였군. 사실 3대 절경같은 거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간만에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친절한 가이드북의 도움으로 잘 찾아온 마쓰시마역은 이런 분위기. 웬지 지하철은 커녕 비둘기호가 서기에도 조금 힘겨워보인다. 배차간격도 무지 길고 당연히 근무하는 역무원은 단 한 명.
역을 나와 여행자의 필수품 생수 한 병을 산 뒤 안내지도를 받아들고 걷기 시작했다. 물론 관광지 같긴 하지만 상당히 깨끗하고 아기자기해서 느낌이 좋다. 더군다나 날씨는 무지 쾌청! 기분, 좋아, 졌어!







걷다가 깨달았다. 마쓰시마... 상당히 작은 동네다.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몇 안되는 관광지들, 굳이 지도도 필요없이 걷다보면 그냥 나온다. 지나가던 주민에게 한 곳을 물어보자 호홋, 하고 웃으면서 '그냥 이 길로 가면 된다'고 한 이유를 알았다. -_-
하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이것.





보인다!









아, 좋구나. 수영은 못하지만 바다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소설은 해저 2만리, 좋아하는 영화는 죠스... 는 아니고. 사실 나는 산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등산이 아니라 산 자체. 산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때가 있다) 얼마전에 생전 처음 본 사주에 내가 수(水)기를 타고 났고 토(土)기가 나를 방해한다고 나왔다. 무신론자에 점 따위 믿지 않았지만 순간 혹했음은 물론이다.-_-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앉아있으니 그야말로 지상천국이다. 문득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빡빡한 스케쥴 속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속에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이 여유가 더욱 꿈같이 느껴진다. 이 여행의 목적이 머리 식히고 쉬는 것이었으니 지금 나는 목적에 너무나 충실한 상태다.




좀 더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목적지는 간란테이. 16세기 말 도요토미가 마사무네에게 하사하고... 뭐 이런 저런 역사가 있는 곳인데 간단히 말하면 역대 영주의 휴식처란다. 달맞이를 하면서 차를 마셨다고 하는데, 달맞이는 못 하겠지만 목조건물에서 운치있게 차 한 잔은 가능하다고 하니 호기심이 동한다.

그리고 찾아간 간란테이.





정말 가이드북과 똑같군. 손질이 잘 된 목조건물이다.
'나는 여기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지금 가능하냐, 들어가보니 아무도 없다, 나 지금 이대로 들어가도 되는 것이냐' 등등의 의사소통이 전혀 안되서 입구의 아주머니와 약간의 소요가 있은 뒤 드디어 차를 내오는 아주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랏샤이마세, 도죠~"

으허...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황송할 지경이다. 들어올 때 산 표를 주고 안내해준 곳에 앉아 있자니 잠시 후 쟁반하나를 들고 들어오는데, 오자마자 무릎을 꿇는다. 이런...!

"아... 어..."

느긋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으려고 했는데, 너무 편하게 앉아있던터라 바로 무릎이 안 꿇어져서 결국 여자애들이 앉는 요상한 자세로 아주머니를 맞이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무릎꿇고 있을 걸, 뭔가 더 비굴한 느낌이다.-_-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맛있게 드시고 편하게 즐기라고 하더니, 무릎 꿇은 상태에서 이마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한다. 아이쿠 이건 또 뭐... 순간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나는 손님의 입장이라 그럴 필요 없다고도 하던데, 뼈속까지 한국인인 나로서는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외국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차 한 잔. 그것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더군다나 과도한 친절까지 받으며.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바닷가에서 느낀 감정에서 한층 더 나아가 한국의 모든 지인들에게 미안해질 지경.

차를 마신 뒤에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사실 그동안의 여행은 뭔가 결정을 하고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실제로 결정을 해야될 것이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몸이 쉬면서 머리까지 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여행하면서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무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어가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던 것 같고, 한국에서의 일이 계속 떠올라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오니 정말 머릿속에 텅 비는 느낌이다. 아무 고민없이 그냥 좋으면 좋은대로 마음껏 여유부리고 행복을 느끼고 있다. 아무래도 제대로 충전이 된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눈과 머리와 마음으로 즐겁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마쓰시마에서 돌아온 나는 바로 짐을 싸서 도쿄로 향했다.






[약간의 사진 방출]













누가 장난친 줄 알았다... 아무리 봐도 헤어캡과 턱받이잖아.
분명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뒷골목 산책에서 발견. 일본인도 아닌데 왜이리 정겨울까?




사진은 좀 흔들렸는데... 야외 테이블에 앉으면 밖이 정원처럼 보이는 멋진 곳.




일본에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 바로 공중 전화기.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