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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쓰는 월기(月記)

만물상 2022. 8. 31. 21:20

2021년 10월
이집트 테마전 소식을 보자마자 당연히 갈 거라 생각했지만 어쩌다가 폐관을 두어 시간 남긴 평일 그 시간에 용산으로 향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래도 예상대로 고요했던 전시실의 그 공기, 오로지 나와 미라뿐인 공간에서 느꼈던 약간의 두려움은 기억하고 있다. 이집트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소파가 마련된 안쪽의 작은 공간에서 책을 보다가 해지는 국중박을 보는 것도 좋았다(캄캄해진 풍경도 좋았지만 통유리 너머로 반짝이는 불빛이 대부분 아파트의 그것이라 좀 아쉬웠다). 사람이 붐볐을 시간이라면 시도도 하지 않았을 상형문자 이름 만들기도 해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전 이름은 ‘태양신의 아들’로 나오고 내가 애정하는 지금의 이름은 ‘영속하는 생명을 소유하신 이’로 나와서 기분이 미묘.



2022년 11월
의외로 스타트랙이나 스타워즈를 안 좋아한다. 오래된 상상력이어서? 그건 아니고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현실적이거나 최소한 현실에 기반한 상상력이 가미된 소재를 좋아하는 편이다(실은 이번에 깨달았다). 스페이스 오페라, 봉건제, 운명론에 입각한 메시아사상, 클리셰 범벅이 우려되는 수십 년 전 원전, 뭐 하나 마음에 드는 요소가 없었는데 어마어마한 허들을 뛰어넘어 <듄>을 본 이유는 단 하나, 말 그대로 ‘듄’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르고 사막 좋다고 봤다는 거다. 사막 풍경이나 실컷 보겠지 했던 안일함을 꾸짖으며 결국 아이맥스 n차 관람까지 하고 말았다.
+ 주인공의 ‘엄마’가 이렇게 중요한 영화는 처음 봤다. 아무리 본격 크루가 꾸려지기 전이라지만 1기 파티원 중 주인공과 함께 살아남은 게 엄마라니. 그래도 레베카 퍼거슨이면 인정이지. 출연하는 줄 모르고 봤다가 너무 반가웠다. ‘액션이 가능한 약간의 조디 포스터 계열’ 느낌으로 좋아함.
+ 출연배우 안 찾아보고 봐서 발생한 두 번째 깜짝 이벤트는 장첸. 장첸? 장첸이야? 중국어 쓰는 거 보니 진짜 장첸이네? (근데 비밀대화를 위한 도구가 중국어라니 너무 뜬금없었다.) 설마 하며 재차 확인했던 가장 큰 이유는 ‘총체적으로 얍삽해보이는 외모’였다. 20년도 더 된 옛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나도 문제가 있다.
+ 영화를 본 후에 검색해보고서야 알았다. 얘가 그 난리였던 ‘콜바넴’의 주인공이었구나. (의외로 이 영화도 안 봄.) 그냥 핫한 젊은 배우 정도로 생각했고, 연기를 못하진 않았겠으나 스토리와 분위기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야. 얘도 얼굴로 스토리쓰는 애였네. 검은 머리와 호리호리한 체형까지, 왜 난리였는지 알게 됐다. 귀한집 아들네미에 딱 맞는 외모와 연기력에 매우 만족.
+ 사실 ‘만족’ 정도로 끝날 매력이 아니긴 한데 내 시선을 잡아끄는 캐릭터가 너무 분명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아트레이데스 공작. 하필 이름도 레토. 정복으로 도열해있을 때, 직접 전투기를 몰며 부하들을 구할 때, 아니 모든 장면에서 너무 이상적이고 순정만화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멋진 걸 어쩌냔 말이야. 이것이 간지라고 막 뿜어내는데. 그 핫하다는 티모시보다 이쪽이라니, 내가 나이들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인가 싶어 약간 우울했다가 트위터에서 ‘너 말고 니 아빠’ 류의 밈이 가득한 걸 보고 안심하였다.


2022년 3월
막 성인이 되었을 때는 아무래도 여전히 학생 신분이라 어른이 된 느낌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의 기분이라는 건 ‘어른’이라는 게 마치 죽을 때까지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이상향의 그 무엇과 비슷하기 때문 아닐까? 심지어 그 이상향은 단계별로 적용되는 모양이고 거기에 더해 상대적 비교수치에 따라 규정되는 바가 달라진다. 어쨌든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층위에 걸맞는 행동과 모습을 해야 하는 모양이라, 나는 일단 피어싱샵으로 향했다.


2022년 5월
주위 사람들에게 안부를 챙겨 묻고 연락하는 성향이 아닌 건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가 웃겨서. 나는 전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일이지만(이 부분이 가장 속 터지는 것 같았다) 내가 외국을 돌아다닐 때마다 연락두절이었던 모양이다. 첫 여행부터 그랬다며 장황하게 쏟아내던 동생이 가장 흥분했던 건 ‘혼자 터키에 간 언니에게 소식이 전혀 없으니 방법을 찾아보라’며 엄마가 동생에게 연락했던 일. 문제는 당시 동생은 호주에 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와이파이만 되면 충분한 지금과 달랐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니 터키갈 때 분명 로밍을 했는데...?
+ 동생에겐 나의 첫 배낭여행이 꽤 강렬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동생은 그게 내 첫 해외 경험이자(두 번째다) 티벳여행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티벳은 그 다음 해)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고. 고등학생이었으니 대학생 언니가 외국으로 떠나는 자체가 나름 임팩트가 컸던 것이다. 배낭을 메고 시커먼 옷을 겹겹이 입은 내가 현관에 서서 “나, 간다.” 하던 모습이 선명하다고.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살가운 성격이 아니니 저 한마디를 남겨두고 떠났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떠났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 아니라 연락하지 않았다.


2022년 6월
예상치 못하게 정선에 가면서 기대했던 건 딱 두 가지였다. 1995년작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처음 인지했던 사북의 흔적을 둘러보는 것과, 정선의 탄광문화촌을 방문해 동원탄좌의 역사 속으로 그야말로 풍덩 빠져보는 것. 사북은 옛 모습이 은근히 남은 역사驛舍 부지를 제외하면 한없이 씁쓸한 곳이었고, 10년 전 영월 탄광문화촌을 보고 반드시 가보리라 다짐했던 정선의 사북탄광문화촌은 대대적인 공사 중이었다. 물론 잘 보존하겠지만 그래도 좀 더 낡고 좀 더 먼지 쌓인 흔적을 밟아보고 싶었던 바램은 허무하게 종료.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여행은 빠를수록 좋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크게 반성하였다.



2022년 7월
사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요소는 온 사방에 있었다. 하늘에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와 온몸을 적시는 세찬 빗줄기를 번갈아가며 쏟아냈고, 광장을 둘러싼 악의는 악의대로, 광장을 가득 채운 선의는 선의대로 극한을 달리고 있었다. 뭐 악의는 알 바 아니고, 역시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 너는 너, Love is Love, We love LOVE, 내가 온전한 나로서 안전하게 설 수 있는 장소. 풀밭을 부지런히 걸어가는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게이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 안에 차고 넘치는 무지개 아이템이 아무 것도 없는, 이곳을 벗어나 떨어져 걸으면 아무도 커플로 생각하지 않을 평범하고 단조로운 차림새의 둘이 손을 꼭 잡고 걷는 걸 보며 조금 울컥했다. 그래, 바로 이 공간이 열려야 하는 이유지.


2022년 8월
누가 보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만 보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탑건>이잖아. 10여년 전 레드카펫과 무대인사로 봤던 톰에 대한 애정도 여전히 충만하고. (사실 그에게 처음 반했던 영화는 <Far and Away>라고, 니콜 키드먼과 나와서 더욱 쪼꼬매보이고 잘생겼던 영화였다.) 일단 87년 버전 돌리고, 87년 OST로 한껏 끌어올리고, 매버릭 OST로 더 끌어올리고, 2회차 관람 완료. 스토리, 미장센, 모든 게 87년과 완벽하게 이어지는 영화 자체야 말할 필요는 없겠고 그와 별개로 조금 슬펐던 지점은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자연의 섭리지만 처음으로 ‘노년의 도입’이 느껴지는 톰의 얼굴에 좀 놀랐던 것이다. 거기다 에드 해리스도, 발 킬머도, 오랜만에 본 얼굴들이 반가우면서도 내 세대의 스타들이 정말 올드맨이 되었구나 실감이 났다. 시작할 때 produced by 제리 브룩하이머 뜨는 거 보고 ‘언제적 브룩하이머야!’ 하면서도 그 이름만으로 더 즐거워졌는데. 내가 보고 자란 스타들이 모여 날고 뛰는 영화는 이제 정말 몇 편 안 남았겠구나 싶어서.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