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들불을 지핀 영혼, 박기순
1978년 12월 28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한 스물두 살 여인의 영결식이 열렸다. 김제에서 농사를 짓다 소식을 듣고 자리하게 됐다는 김민기라는 청년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훗날 <상록수>라는 제목이 붙여진 노래가 작곡자 스스로에 의해 처음 공연되는 순간이었다. 군복바지와 낡은 티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던 걸걸한 목소리의 여학생 박기순은 그렇게 남은 이들의 흐느낌 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8개월 전, 박기순은 새로운 야학을 꿈꾸던 대학생이었다. 광주 산수동 ‘꼬두메’ 야학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그는 노동자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돕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해 4월, 서울에 있던 친구 전혜경의 집에서 서울 구로공단 ‘겨레터 야학’ 동향인들을 만난 후, 광주까지 그 인연이 이어져 함께 새로운 꿈을 꾸릴 사람과 방법을 찾고 있었다. (후략)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701930
그 겨울, 붕어빵 아저씨는 어디에
(전략) 그날 아침도 용역들은 노점상들이 자리를 펴자마자 달려들어 손수레를 엎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단속현장을 둘러싼 용역들에 막힌 이근재 씨는 밖에서 포장마차를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내를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날 밤 그의 곁에서 아내가 끙끙 앓았다. 뜬 눈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잠이라도 한숨 잤을까? 그는 평소 정발산에서 매일 하던 새벽 운동을 거르고 인력시장에 나섰다. 몸이라도 건강해야 한다며 임진각 마라톤 대회도 나섰던 그였다. 그러나 막 찬바람이 들이치기 시작하는 계절, 그를 위한 일자리는 없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 철도변 길에서 목을 맸다. 남긴 유서 한 장 없었다.
고양시는 단속 현장의 대상자도 아니었고, 유서도 한 장 남기지 않은 개인의 신병비관 자살은 단속과 무관하다며 대화를 거부했다. 한 달이 다 돼가도록 장례가 치러지지 않은 이유였다. (후략)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688000
스물여섯 늦깎이 법학도의 마지막 당부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 어림 반 푼 없는 소리제. 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 그 맴이 어찌 식겠어….”
비가 내리던 1985년 9월 17일, 성남 모란 시장 건너편에 자리한 경원대(지금의 가천대) 법학도 송광영이 휘발유를 몸에 뿌린 뒤 ‘학원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과거 YH무역이 있었던 건물에 자리한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공권력의 감시 속에서 한 달이 넘도록 병상에 누워 있다가 같은 해 10월 21일, 어머니 이오순의 오열 속에 숨을 거뒀다.
(…중략…) 그가 경원대에 입학하던 해 가을, 학내에는 비민주적인 재단운영으로 분규가 잦았다.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그가 이끌게 되면서 그의 대학 생활은 늦깎이 법학도가 가져야 할 평화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 학회를 만들며 학생운동을 주도한 그는 1985년 여름, 광주항쟁 시민군 출신으로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전남도청 앞에서 분신한 노동자 홍기일의 외로운 죽음을 접한 뒤, 대학생 신분으로는 처음 분신자살을 결행했다.
그의 죽음 이후, 상계동에서 꽃집을 하던 어머니, 월남 파병 후 고엽제 피해자가 된 형의 삶도 바뀌었다. 그의 죽음은 당시 한국 사회가 은폐하고 외면해왔던 많은 모순들을 한 몸인 듯 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1천여 명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그가 안치된 병원에 상주하며 감시했다. 그러나 그 야단법석이 무색하게도 그의 죽음은 어느 언론에도 기사 한 줄 실리지 않았고,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하는 등 경찰의 계속되는 방해 속에 장례식과 영결식도 없이 안장되었다. (후략)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657643
29년 전 여름의 기억, 김수경
1990년 6월 5일 대구 경화여고, 오후 5시를 살짝 넘은 시각. 고3 수험생 수경이는 청소 시간에 짬을 내어 친구 소연이와 교문 앞 문구사에 들르려던 참이었다. 열 명 남짓의 학생들이 드나들던 교문 앞에서, 체육교사 서 모 선생이 수경이와 소연이를 불러 세웠다. “너희같이 기분 나쁜 놈들은 처음이야.”라는 폭언과 함께 시작된 구타는 체육실 앞까지 이어졌다.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이었다.
(중략) 수경이는 인문관 4층 옥상에 생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그가 몸을 던진 곳에는 부모님께 남긴 16절지 크기의 유서가 놓여있었다. 그의 부모님 또한 교사였다. 그가 차가운 바닥에서 발견된 것은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인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1년여의 준비 끝에 전국교직원노조(이하 ‘전교조’)가 결성되자마자 그들이 처음으로 해야 했던 일은 그들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었다. 600개 분회 2만여명의 조합원들로 출범한 지 한 달 만에 1,50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는 국면으로 이어졌고, 대구 경화여고도 6명의 교사가 해직되었다. 그중에는 당시 고2였던 수경이의 담임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경이는 그 반의 반장이었다. 그녀는 해직교사들에 대한 징계철회를 요구하는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학내 시위를 이끌었다. 전교조 자료에 의하면 교육 당국의 조기방학 시도에도 불구하고 89년 여름 전국적으로 211개 학교, 34만 명의 학생들이 징계철회 시위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운동’이라는 단어가 한 시대에만 고립되어 있을 사어(死語)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단견이 될 수 있다. 학생시절을 보낸 고등학생 활동가들도 28년 전의 자신만큼의 자식들을 가진 성인이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대학, 노동, 시민단체, 정당의 주력 활동가로 성장했다. (후략)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571829
처음 접한 이후 매번 고대하며 기다리고 가장 유심히 읽는 김경원 감독의 글. 이런 기록 정말이지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 더 이상 주절주절 말을 보태면 안 될 것 같고, 가장 최근 글은 ‘선택이 형의 1주기.’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825852 김경원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과 동명의 이런 책도 있다. http://aladin.kr/p/gPt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