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마차와 키예프의 시간
두 달 전 청평. 이른 시간부터 고요한 산길에 올라 기가 막힌 영상과 사진들을 남겼는데, 구구절절한 설명은 하기 싫고 결과적으로 다 날림. 디지털을 이렇게 증오한 건 베트남에서 잠시 라오스에 갔을 때 기록을 날린 이후 두 번째. 휴지통을 뒤져서 산에서 내려와 들렀던 카페에서의 사진 한 장 건졌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고 부모님 고향인 경상북도만 들락거리며 살아온 내게 왠지 모를 로망이 있는 남쪽나라. 광주 출장 다녀오면서 인상 깊었던 건 언제나 그렇듯 산이 없는(있지만 내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풍경이었다. 훨씬 아름다운 장면이 많았는데 이놈의 KTX가 워낙 빠르기도 하고 차장에 내가 너무 비쳐서 실패.
내 젊음을 함께 한 CD플레이어가 드디어 사망했다. 사진을 찍은 2021년 2월 15일은 사망확인일이고 정확히 언제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20년이 넘었으니 보내줄 때가 되긴 했다. 보기만 해도 저 안에서 돌아가던 수많은 음악들과 그걸 듣던 시간이 떠오른다. 아, 정말 고마웠다.
나름 핸드폰 충전에 신경을 쓰는 편인데 종일 정신이 없었다. 3% 남았다며 깜박거리는 핸드폰을 들고 망했다 하며 버스를 탔는데 이런 문명의 이기. 대한민국은 대단하다!
집안을 온통 디즈니 세계관으로 꾸몄다는 어느 외국인의 인테리어짤을 봤는데, 별 감흥없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발견한 이 마차. 보자마자 어릴 적 내가 너무 좋아하며 가지고 놀던 비슷한 모양의 금색 플라스틱 마차가 생각났다. 그냥 생각난 게 아니라 그걸 만질 때의 감촉, 손 안에 쥐여지던 크기와 무게, 가지고 놀던 공간, 모든 것이 밀려들어와 마치 프루스트 효과처럼 현재의 시공간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다. 모든 기억은 남아있나 보다. 건드려지지 않았을 뿐.
SNS를 전혀 하지 않지만 필요할 때 검색하거나 링크를 열어보기 위해 가입은 하고 있다. 수많은 스팸과 청구서와 이런 저런 메일 속에서 ‘너 혹시 평소와 다른 곳에서 로그인 했니’ 류의 이메일을 발견했다. 구글도 그렇고 이런 메일이 워낙 많아 지나치고 있었는데 열어보니 이런 메시지. 내가 다음 노트북을 레노버로 할까 고민 중이긴 하지만 아직 사진 않았는데.
근데 우크라이나고 K로 시작하니까 당연히 키예프라고 생각했는데 Kyiv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한 거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간단히 정리하자면 키예프Kiev는 러시아식이고 키이브Kyiv가 우크라이나식이라는 듯. 키이브 말고도 키이우, 끠이브 등이 있었는데 어쨌든 러시아를 거치지 않은 우크라이나어-영어 음역의 발음표기라는 모양이다. 영문으로 된 현지 언론들을 살펴보니 #KyivNotKiev라는 해시태그 운동도 있고 세계 주요 공항의 표기를 바꾸는 노력도 하고 여튼 저 나라 사람들에게는 뭔가 중요한 것 같았다. 뉴욕타임즈에 ‘Kiev, Kyiv, How Do You Pronounce (and Spell) It?’이라는 매우 구미 당기는 기사가 있었지만 내용을 읽기 위해서는 결제가 필요했기에 귀찮아서 포기.
이런 걸 보면 역시 인간은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며 그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긴 한데, 예전에 어느 예능프로에서 88인가 89학번인 연예인이 ‘독일 수도가 본 아니야? 언제부터 베를린이었어?’ 하던 것도 생각나고, 요즘 애들은 요오드나 아밀라아제라는 단어를 배우지 않는다는(그렇게 된지 이미 십수년 됐다는) 것도 생각나고. 내겐 당연히 키예프였던 곳이 누군가의 시간에서는 키예프가 아닐 수도 있는 거고. 어쨌든 해킹 덕분에 매우 알찬 정보를 수집하고 계정은 삭제했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