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뒷이야기
#1
드디어 티벳을 떠날 시간이다. 라싸에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공가공항에는 외국인뿐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중국인이 득실득실하다. 그것도 모피와 가죽으로 멋을 낸, 티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 슈트케이스들도 어찌나 큰지 다들 이민이라도 가는 태세다.
수속을 마치고 짐을 부치러 갔더니 여직원이 굳이 안부쳐도 된다고 한다. 내용이야 그렇지만 '이까짓 지저분한 배낭 넣어줄 자리없어!'와 진배없는 어투. 싸가지하고는. 어쨌거나 부쳐달라고 하니 슬쩍 짜증을 낸다.
자,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과연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가방에는 샤허에서 산 칼이 들어있었다. 티벳탄들의 전통복장을 보면 남자들이 허리춤에 다들 칼을 달고 다니는데, 꽤 괜찮아 보여서 선물용으로 하나 구입한 것이다. 장식용이 아니라서 그런지 날이 생각보다 예리해서 혹시 통과하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어디한번 보자구. 가방을 올려놓았다.
삐ㅡ삐ㅡ삐ㅡ삐ㅡ
그럼 그렇지.-_- 두말할 것 없이 걸렸다. 와보랜다. 외국인인데다가 이런 일은 흔하지 않아선지 다들 몰려든다. 수많은 눈길을 받으며 공항직원들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엑스레이 모니터를 슬쩍 봤는데, 누가봐도 '칼이네' 할 정도로 온전한 모양을 드러내며 화면에 콱 박혀있었다. 이렇게.
다른건 다 흰색에 대충 형태만 보이는데
칼만 진한 남색으로 뚜렷이 보임. =_=;
제기랄... 빼도박도 못하고 내줘야겠군. 벌써 내 배낭을 가운데 놓고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는데 당장 오픈하라고 할 줄 알았더니 자기네들끼리 수근댈 뿐이다. 근데... 응?
"이걸 빼라구요?"
그들이 가리킨 건 배낭 옆 그물망에 들어있는 산악용 스테인리스 컵. 이거? 정말 이거 말이야?
컵을 뺐더니 배낭을 내어주며 다시 통과시키랜다. 저기-_-... 정말... 괜찮겠어? 설마 저렇게 나오는 칼을 못봤나?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다시 통과시켰다. 결과는.
"OK."
=_=......
뭐, 다행이긴 하다만... 그렇게 통과했다는 얘기다. 칼을 넣은 내 배낭은 청뚜에서 출국할 때도 아무문제 없었다. 기내에 가지고 타지만 않으면 상관없나보지?
#2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 청뚜국제공항.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고픈 배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해서 공항을 한바퀴 돌았지만 도대체 먹거리를 찾을 수가 없다. 영종도공항의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등등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여기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차이니즈 레스토랑 외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분명 저런 곳은 비싸고 맛도 없을텐데...
한참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발견한ㅡ 카페라기에도 레스토랑이라기에도 무색한, 우리가 90년대 중반까지 커피숍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커버의 쇼파형의자가 놓여져 있고 조악한 테이블보 위에 꽃한송이가 부조화의 미를 이루는 그러한 곳. 그래도 간단히 요기하면서 시간을 때울 수 있을 거라는 예상에 자리를 잡았다.
만물상 : "어, 여기 우육면도 된다."
돌고래 : "그러네. 그거 먹을......"
만물상 : "......"
...30위안.
조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하자면 중국돈 30위안은 당시 환율을 적용해 보았을 때 우리나라 돈으로 약 4천원내외. 물론 한국의 일반적인 식당이라면, 아니 공항이라는 특수성을 더해본다면 그다지 비싼 가격은 아님.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그간의 2위안짜리 우육면은 대체 뭐냐고..........?
하지만...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 토할것 같은 심정으로 30위안짜리 우육면과 38위안짜리 핫초코를 주문했다. 오직 간장만이 들어간듯한 짜디 짠 육수에 얇은 면덩어리를 말아가지고 나온 우육면과, 네스퀵보다 2% 맛없는 핫초코를 마시고 더더욱 우울해진 나와 돌고래. 계속 입을 불퉁거리면서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나니 목이 마른 것은 당연지사였다. ...간장국물을 마셨는데 말할 필요도 없잖아.
"가서 물 사올게."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서 카운터의 물병을 주문했고, 이미 물병은 꺼내져 내 손으로 넘어오고 있고, 나는 돈을 꺼내 든, 말하자면 다시 번복하기 조금 민망한 상황에서 직원은 말했다.
"28위안입니다."
"......?"
"28위안입니다."
하마터면 2.8위안이라구요-_-? 할 뻔 했다.
아무리 양보한 환율을 적용해도...
3780원!!!!!!!!!!!!
가게에서 사먹는 물한병은 1위안 아님 1.5위안인데... 최대 28배의 가격=_=!!!!!!!!!!!!!!!!!!!!!!!!!!!!!!!
그러나 이 시점에서 만물상의 어이없는 허세가 부려졌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뭐가 그렇게 비싸?" 하면서 주문을 취소하고 어떻게든 타는 목마름을 참고 비행기에 올라 스튜어디스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게 맞는 것이었지만, 순간 멈칫했을 뿐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만물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폐를 건네었다.
쪽팔리다 이거지......-_-...
조금은 상대적인 문제다. 시장 안 국수집이었다면 에에~ 아줌마 저 돈이 이거밖에 없는데요? 저희 학생이예요~ 넘 비싸요~ 라고 말이 나왔겠지만 여기는 공항. 상대방은 약간은 촌스럽고 수수한 복장과 메이크업을 했지만 나름의 도도함으로 무장한 '비싼 공항 라운지'의 직원.
그 앞에서 비싸다고 물한병 못사먹는 모습은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쯧... 그렇게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성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렸던 모양이다. 씁쓸한 결론.
그래도 비싼 값을 한다고 갖다놓았는지 직원이 건네주는 것은 에비앙이다.
"나 이 물병 절대 안 버릴 거야."
악의 기운으로 가득차 씹어내듯 뱉어낸 그때의 저 한마디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나의 전용물병은 바로 저 에비앙 물병이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입을 대며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_-
(여행을 다녀온지도, 여행을 다녀와서 이 글을 쓴지도 무척 오래됐다. 지금은 물병을 갖고 있지 않다.)
#3
여행기를 정리하며 오랜만에 티벳여행 수첩을 꺼냈다가 발견.
아무 생각없이 수첩 귀퉁이에 끄적여놨는데 지금 와서 보니 재밌다. 좀 더 그려놓을 걸.
발로 그린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추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