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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스타와 유부초밥

만물상 2020. 8. 9. 17:53

1.
인생 첫 3차병원 경험을 선사해준 약물 알러지와 별개로 또 다른 알러지가 작년부터 날 괴롭히고 있다. 의사가 말하는 원인은 환경이 바뀌어서, 먼지가 많아서, 체온이 올라가서, 기타 알 수 없는 이유. 즉 정확히 언제 발생하고 뭘 조심해야 하는지가 명확치 않다. 발현 부위도 매번 다르고 심할 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매일 약을 먹는다(한 번 병원 가면 두 달 치를 받아온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건조해서, 더워지면 습기와 온도가 높아져 심해지니 결국 365일 달고 산다는 얘기다. 병원에 가는 게 엄청 싫은 것도 아니고 약 먹는 게 고역도 아니니 대체 뭐가 문제일까 생각해 봤는데,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는 자체가 일종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결론을 내렸다.


2.
스타를 좋아하는 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주일 정도 눈길을 주든 몇 년 동안 덕질을 하든, 스타들은 일정한 ‘시기’ 동안 날 행복하게 만들었다. 내 인생에 그렇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으니 바로 장국영과 마이클 잭슨. ‘시대를 풍미했다’는 수식어가 붙는 스타는 역시 다른 건가. 예전에 좋아했던 스타들을 어떤 계기로 떠올리게 되면 아 그때 그랬지, 즐거웠지 하는데 이 둘은 마치 새로운 스타처럼 등장한다. 그리곤 일정 기간 동안 내 혼을 빼놓고, 수그러들었다가, 어느 정도 텀이 지나면 또다시 등장한다. 그것도 매번 같은 수준의 흥분과 설렘으로. 장국영 붐이 영화로 시작된다면 마이클 잭슨은 거의 데인져러스 뮤직비디오(흔히 생각하는 pv말고 다양한 영상클립으로 이루어진 비디오앨범) 아니면 전설의 부카레스트다. 대 유튜브 시대의 축복으로 뮌헨, 웸블리, 각종 레전드 무대 등등을 섭렵하고, 묵혀둔 음악을 꺼내고, <디스이즈잇>을 보고 울컥하며 마무리하는 게 대부분의 수순. 그러니까, 다시 돌아올 것이다.


3.
미우라 하루마가 눈에 들어온 건 역시, 히트의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였던 <블러디 먼데이>에서였다. 사실 그 이후 특별히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다. 아니 찍기도 많이 찍고 인기도 많았는데.. 잘생긴 일본 청춘스타들의 통과의례인 만화 원작의 오글거리는 멜로물은 패쓰, 역시 잘생긴 게 개연성이 되는 로코물도 패쓰, 치밀하지 않은 시놉 속의 평범한 연기도 패쓰. (인상에 안 남았다는 거지 보기야 꽤 봤다) 그럼에도 미우라의 연기를 기억해두고 있었던 건 <나를 보내지마>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그 기괴함, 두려움, 우울함, 처절한 분노와 상실감, 떠올리기만 해도 심연으로 빠질 것 같은 작품 자체의 임팩트도 워낙 셌지만(원작은 겁나서 못 읽었다) 그 안에서 미우라의 연기는 꽤 좋았다.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아야세 하루카나 미즈사와 아사미는 내가 아는 연기를 하고 있었고 배우가 명확히 보였는데 미우라는 그가 맡은 배역만 보였다. 어눌하고, 조심스럽고, 무심하지만 예민한 캐릭터는 스토리의 중압감에 지지 않고 잘 녹아든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사망소식에 처음 든 생각은 ‘아깝다’였다.


4.
유부초밥을 좋아한다. 소풍갈 때 엄마가 싸주던 삼각형 유부초밥도 좋지만 초밥집에 있는 짙은 색의 사각형 유부초밥을 특히 좋아한다. 회전초밥집에서 기쁜 마음으로 몇 접시를 먹으면 꼭 싼 거 그만 먹고 생선초밥 먹으라는 잔소리를 들어서 좀 억울하다. 어쨌든 그런 내 기억에 유독 강렬하게 남은 유부초밥이 있으니, 일본에서 잠시 일할 때 사시이레(공연, 촬영을 비롯 ‘현장’에서 일할 때 축하나 격려의 의미로 받는 건데 보통 나눠먹을 수 있는 간식이 많다)로 들어왔던 초밥이다. 유부가 뒤집어져서 모양도 식감도 독특하고, 유자향이 배어 있어 짭짤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사시이레로 유명한 집인지 100개들이 상자가 몇 번이나 들어왔었는데, 케이터링대에 세팅해놓고 오며 가며 무지하게 집어먹었던 기억이 있다. 갑자기 생각나서 유부초밥, 유자맛, 역逆, 뭐 이런 걸 조합해서 뒤져봤더니 록폰기에 있는 오츠나 스시(otsuna-sushi.com)라는 곳. 먹고 싶다. 도쿄에 가게 되면 꼭 먹을 것이다. 근데, 지금 일본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한일관계와 상관없이 한 시대가 지나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5.
습기에 패배하는 삶은 계속되고 있다. 더위보다 습기가 문제인 건 많이들 그렇겠지만 유독 약하긴 하다. 비구름은 많이 끼고 기온은 낮았던 어느 날, 끈적거리는 내 몸을 만지며 일행들이 놀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베트남의 여름이 생각보다 살만했을 것이다. 이 비의 끝에 다시 더위가 올지 새로운 계절로 접어들지는 모르겠다. 아마 첫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는 언제나처럼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