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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카페를 찾아가는 고독한 여정에 대하여 下

만물상 2019. 6. 8. 22:36

 

역광 탓에 좀 더 강렬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길 위에 섰을 때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오는 내내 저물고 있었다는 게 맞겠지.

 

누군가 보이면 교통편에 대해 물어보려 했는데 도대체 사람이 없었다. 이 마을에 도착한 이후 나올 때까지, 처음에 내게 인사해 준 할아버지가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었다. 혹시 이 마을은 이미 사라진, 잊혀진 마을인건가? 마지막까지 마을에 남아있던 할아버지의 원혼이 날 맞아준 것인가!

 

나는 고장난 기계처럼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었기에 망상을 할 시간은 충분했다. 글을 나누어 쓰고 있지만 화산을 찾아 섬의 반대편까지 갔던 것도, 공룡과 사쿠라를 찾아 산 위 공원을 갔던 것도, 그리고 지금 이 로드트립도 다 같은 날이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 동안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을 걸었던 것이다.

 

종국에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다시 걸어서 돌아가면 이건 트리플 크라운이야(대체 무엇의).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걷기로 끝내는 게 좋잖아. 누가 이렇게 섬 곳곳을 발로 밟아봤겠어? 이렇게 나는 훌륭한 정신적 승리를 거두며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다시 걸었다.

 

 

 

 

 

 

 

더 오래 걸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사쿠라로드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직선코스에는 가로등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걷기에 그 길은 너무나 자연친화적이었다. 뭐가 튀어나와도 놀랍지 않은 그 기나긴 길을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홀로 걷는 내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사쿠라로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관광코스이기 때문에 기본 조명은 있을 거라는 판단이 되었다.

 

마을에서 나와 이쪽 도로에 진입했을 때 바로 사쿠라로드 표식이 있었기에 그냥 산책길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카라스지마 전망대까지는 올 때 코스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위 사진 중 다리 중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저 멀리 다른 다리가 보이는데 저게 마을로 갈 때 통과한 다리였다. 그때만 해도 그냥 저 반대편에도 다리가 있구나 했지 내가 걷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누가 봐도 저녁의 범주 안에 들어왔다고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둠이 깔렸다. 관광객 없는 전망대를 올려다보자니 아일랜드뷰를 타고 지나갔을 때가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인파를 피하고 싶다며 요리조리 돌아다녔는데 정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는 혼자인 것이다. 시야가 닿는 곳에 인간이라고는 오직 나뿐인 시간이 이렇게 길 줄이야. 사쿠라지마의 화산신이 도우셔서 내 원을 너무 화끈하게 들어주신 건가. 여전히 터벅터벅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뭔가 저 멀리 생명체의 몸짓이 보였다.

 

 

 

 

아아. 고마워요. 이리저리 꼬드겨 봤지만 녀석은 당연하게도 내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본인이 충분하다고 여길 정도로 늘어져 있다가 쿨하게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그래도 나는 길 위의 작은 만남이 너무 행복했다.

 

예상대로 가로등 불빛이 이어져 다행이었다. 위에 썼듯이 나는 다시 걸어서 돌아가는 상황이 딱히 고통스럽지 않았는데, 밤이 되자 오히려 또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늘어선 벚나무들이 가로등 조명을 받아 또 다른 볼거리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요자쿠라夜桜라고 해서 밤에 보는 벚꽃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다. 봄의 하나미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넓은 사쿠라로드를 전세내고 혼자 요자쿠라를 즐기는 셈이었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인파 걱정없이 꽃놀이를 즐기는 게 어디 쉽던가? 어쩔 수 없이 나는 더 즐거워지고 말았다.

 

어차피 이 여행 자체가 세심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여행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나타난 순간부터 더욱 즐거워지곤 했다. 분석으로 온 몸이 엉망이 되었지만, 기껏 찾아간 곳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모든 시간이 행복했다. 결과를 알았다면 움직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 종일 걷고 또 걷는 동안 내 눈에, 귀에, 코에 들어온 모든 것들은 그 어떤 완벽한 준비로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정보를 다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서 아, 역시 그렇네, 하는 것보단 역시 이쪽이 내 취향이었다. 아무리 삽질이 이어져도, 그럼에도 즐거운 게 여행이니까.

 

그렇게 긍정의 힘으로 똘똘 뭉친 내게도 마지막은 어쩔 수 없이 기뻤다. 나는 드디어 숙소 앞에 펼쳐진 가고시마의 불빛과 밤바다를 볼 수 있었다.

 

 

 

 

 


[뒷이야기]

 

엄청난 하루를 보냈으니 숙소에 오자마자 뻗었을 것 같지만, 이럴 때를 위해 온천호텔에 묵는 것 아니겠나. 나는 대강 허기를 때우고 바로 대욕탕으로 향했다. 머리카락 사이에 들러붙은 마지막 분석까지 다 제거하고, 유카타와 한텐을 입고 시원한 맥주까지 챙겨들고 2층 테라스에서 휴식을 즐겼다.

 

여기서 만난 키리시마 형제와의 대화가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웠는지! 온 가족이 여행 와서 즐기는 모습이 참 좋아보였는데, 한국인인 나를 가감 없이 대해주어 정말 고마웠다. (사실 한창 웃고 떠들다가 “근데 어디서 오셨어요? 도쿄?”라는 질문에 “한국이요” 했더니 이 순박한 형제가 너무 심하게 놀라서 미안할 정도였다)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던 대화가 정치 문제로 흐르고, 형제는 왜인지 민망해 하는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옛날 일은 일본이 확실히 나빴던 것이라며 죄송하다고 재차 말했다. 개인과 개인이 사과를 주고받을 일인지는 모르겠고, 다만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으로써 이런 부분에 대해 내 의견을 피력할 준비를 좀 제대로 갖추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어쨌든 형제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사진을 다시 보다가 오늘에서야, 그러니까 여행 다녀온 지 15개월 차가 되어 알게 된 놀라운 사실.

 

 


내가 마멘차야를 방문했던 날은 금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