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04 Tibet

[티벳] 16. 에피소드 in 라싸

만물상 2008. 6. 6. 21:44



마지막 종착지라서 그런지 라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매일매일이 느긋함의 연속이다. 마지막으로 아침을 먹어본 건 기억도 안나고 항상 느즈막히 일어나서 아점을 먹는다. 이래저래 익숙한 얼굴들을 만나다보면 시간이 절로 가고, 저녁 때는 Bar에 가서 노는게 일이다.

전에 어느 여행기에서, 한 달을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 라싸여행자들의 터줏대감이라는 걸 읽었을 땐 '아니 한 달있으면서 왠 터줏대감?' 했었는데 이제야 실감을 한다. 도대체가 돌아다니는 외국인 중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다.-_- 이렇게 한 달을 있다간 정말이지 터줏대감이 되고도 남겠다. 오죽하면 나중에 만난 한국남자애도 "안그래도 한국인 여자 두 명이 돌아다닌다는 얘길 들어서 만나고 싶었다"고 했을까.

하지만 중요한 건, 매일매일이 여유롭고 느긋하지만 매일매일이 재밌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여행이 좋은 거다. 매일 만나는 얼굴이고 매일 가는 곳이더라도 여행에서의 하루는 전혀 달라진다.



 1  배드보이스 - 라싸의 아이들

그날도 느긋하게 일어나서 펜톡에 모인 나, 돌고래, 니코, 다카. 일단 마마특제 밀크티부터 한잔씩 마신 뒤 언제나 먹는 것들을 시켰다. 여전히 솜씨좋은 마마의 요리를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한 떼의 아이들이 들어온다. 우리는 마주보며 "배드보이스다!" 라고 중얼거렸다.

라싸에는 담배피우는 아이들이 정말 많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십대 청소년이 아니라 8~12살 정도 되는 정말로 '아이들'이다. 이놈들이 마마의 식당을 아지트로 삼고 있어서 우리가 갈 때마다 얼굴을 보게 되는데 정말이지 보기가 좀 그렇다.

호기심 삼아서 어쩌다 피워보는 게 아니라 아주 제대로 피운다. 한 녀석은 나도 못하는 도넛만들기에 열중해 있고 6~7살 정도 되어보이는 꼬마들은 언니오빠들이 하는 걸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 이녀석들이 니코가 피우는 롤링 시가렛에 관심을 가졌는데 한번은 그걸 건네주는 니코를 보고 기겁한 적이 있다. 마마네 DVD에서 나오는 잔인한 홍콩영화는 애들 정서에 안좋다고 하더니 담배는 껄껄 웃으며 건네주는 것이다. 뭐랄까, 니코는 그냥 '아이들의 한때 장난'식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는데 나와 돌고래, 다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시아과 유럽의 차이점일까?

보면 녀석들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꼬마들과 달리 옷도 꽤 잘 입었고 굉장히 깔끔하다. 그 중 물주격으로 보이는 여자애는 키도 늘씬한데 얼굴도 새침하고 옷도 잘 입은 것이 영락없는 '천사들의 합창'의 마리아 호아키나다. 요녀석들은 티비 바로 앞자리에 둘러 앉아 뻐끔뻐끔 피우면서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밑으로 숨는다. 우리는 이들을 '배드보이스'라고 불렀는데 한번은 마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마마, 쟤네 부모들도 애들이 담배피는거 알아요?"
"당연히 모르죠. 처음에 애들한테 너희 부모도 아냐고 물어봤더니, 아시는 날엔 큰일난다면서 제발 말하지 말라고 통사정을 하는 거예요."
"도대체 담배살 돈은 어디서 나요?"
"쟤네들 중 한두명은 부모가 통역을 해요. 아무래도 영어통역을 하고 여행가이드를 하니 이곳 사람들 중에선 수입이 많은 편이지요. 부모 둘 다 밖에 나가서 하루종일 일하기 바쁘니 애들한테는 용돈이나 두둑히 주는 수 밖에 없고, 애들이 하루종일 뭘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마마는 이제 4살인 마마의 딸도 걱정이 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어디나 아이들의 교육은 골칫덩이인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도 달라이 라마의 자서전을 읽으며 티벳에 대한 꿈을 꾸는 외국인들이 속속들이 모여드는 상황에서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 건 사실이었다. 이렇게 담배피우며 돌아다니거나 외국인한테 구걸하거나 둘 중 하나인 아이들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2  여행자라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다

슬슬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야 되기 때문에 야크호텔 피씨방에 왔다. 돌고래와 함께 들어가니 뭔가 분위기가 안좋다. 서양여자 한명이 컴퓨터 앞에 앉아 화를 내는 중이고 그 옆엔 어려보이는 호텔여직원 두 명이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다.

머쓱해져서 돌고래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화를 가라앉혔던 여자가 또다시 직원들을 부른다. 여자는 뭐라뭐라 짜증을 내고 직원들은 어떻게 해보려고는 하는데 역부족인 모양이다. 하도 짜증을 내길래 결국 말을 걸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중국어 할 줄 알아요? 할 줄 알면 말좀 해줘요. 난 이 사진을 여기에 넣어야 하는데, 이 설정을 바꿀 수가 없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네요."
"잠시만요... 무슨 일이예요?"
"이 여자분이 컴퓨터로 이 작업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저희는 잘 몰라서요. 영어로 된 프로그램은 없고 저희도 영어를 못하는데..."

나도 잘은 못알아들었지만 어쨌든 중국어로 얘기하는 직원의 말을 듣고 있으니 조금 이해가 간다. 그래서 한참 듣다가 나도 모르게

"아..."

했더니.

"아? 뭐가 아, 라는 거죠? 뭘 이해했다는 거예요? 나한테 얘길 해봐요! 이사람들 알아듣긴 한 거예요? 그럼 뭐가 문제죠?"

....이쯤에서 나는 짜증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_-

그러니까 이 여자가 워드로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도중 문제가 생겼는데, 워드에는 오직 중국어만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직원들도 워드를 사용할 줄 몰랐다. 사용할 줄 모른다면 메뉴에 있는 한자들을 영어로 말해달라고 했는데 그 역시 영어를 할 줄 모르니 불가능. 결국 이 여자는 노발대발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직원들에게 물었다.

"그럼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
"그게...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내일 되야 영어하는 직원이 있어요."

난감하구만. 나나 돌고래도 워드를 잘 못다룰 뿐더러 메뉴를 해석하는 능력도 없단 말이다.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 없겠구려. 상황만 이해시키는 선에서 얘길 끝내야 했다.

근데 이 여자가 끝까지 짜증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외국 땅에서 그 나라말 못하는게 자랑이냐? 그리고 여기 직원들은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라 인터넷 연결해주고 돈받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곳에서 컴퓨터 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일이지... 화가 나는 건 알겠는데 하는 꼬락서니가 영 마음에 안든다.

"이봐요! 이리 와봐요!"

또 직원을 부른다.

"이거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이걸 해석해 달라구요!"
"음... 아..."
"됐어요, 됐어요. 아~주 고맙군요. 당신이 아주 큰 도움이 됐어요. 정말 감사하네요."

제대로 비꼰다. 아니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싸가지가 아주 하늘을 찌른다. 발음을 보니 영국쪽인 것 같았는데 정말 성격한번 뭣같다. 그런데

"중얼중얼...bitch...중얼중얼..."

...아니-_-!!!
분명히 들었다.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있었거든. 아니 이뇬이-_-!!! 결국 욕이냐? 싹퉁머리 하고는... 안그래도 직원들을 하인부리듯 하더니 결국 욕지거리다. 얘네가 니 식민지 하인이냐? 그래도 손님이라고 직원들은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와 돌고래에게 계속 얘기좀 해달라고 하는데, 이런 인간은 정말 상종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결국 여자는 짜증만 내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버리고 말았다.



 3  다카에게 목욕을

조캉 주변을 돌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조금 있으면 다카가 목욕을 하러 오기로 했다. 야크호텔 도미토리에서 덜덜 떨던 우리는 결국 돌고래까지 감기기운이 보이자 니코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곳으로 옮겼다. 조캉 옆에 있는 만달라 호텔인데 꽤 시설도 좋고 영어도 잘 통하는데 안쪽에 있어서 그런지 외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트윈룸이 150위안인가, 200위안인가 했는데 니코가 자기 친구들이라고 말을 잘해줘서 100위안에 묵게 되었다.

침대에 티비에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실은 물론 히터도 있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었지만, 돈도 많이 남은 데다 몸이 아픈 상황에서 여행해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묵기로 했다. 덕분에 다카에게 친절을 베풀(?) 수도 있게 되었고. 바로 옆방이 니코의 방이라 만나기도 쉽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전망이다. 방에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는 조캉 사원과 광장이 그대로 보인다. 더군다나 옥상에 올라가면 간이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는데 라싸 시내 전체를 볼 수 있고 저 멀리 포탈라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래저래 모든 게 마음에 드는 호텔이다.

다카는 목욕을 한다고 하더니 30분만에 나온다.

"어라? 벌써 다했어? 샤워 아니고 배쓰 한거 맞어?"
"벌써라니, 30분이나 있었는데."
"한국에서 그 정도면 아무것도 아냐. 우린 두 시간도 하는데."
"진짜??"

깜짝 놀라는 다카. 이건 나중에 일본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후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인들이 말하는 목욕은 우리와 좀 다른 것 같다. 특별히 온천같은 곳에서 하는 게 아니라면 평소에 샤워할 때도 30분 정도 욕조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푼다고 한다.

"근데 물이 자꾸 줄어들어. 밑에 막아놓는 장치가 고장났는지 직접 누르고 있지 않으면 물이 점점 빠져나가서 줄어들어. 물속에 앉아있으면 점점점 수위가 낮아져. 이렇게..."

말하면서 몸으로 표현하는데 너무 웃긴다. 물이 줄어든다는 걸 "getting few, really really getting few" 라고 해서 나와 돌고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니 어째서 대화가 이렇게 잘 되는 거지? 다카와 있으면 웃을 일 뿐이다.



 4  추억이 쌓이는 펜톡

저녁을 먹기 위해 잠시 고민하다가 펜톡으로 향했다. 하루에 두 번이라니, 이례적인 일이다. 들어가니 예상치 못한 방문에 마마가 엄청 반갑게 맞아준다.
저녁을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엇, 이런!

"정전이다!"

팟, 하더니 티비와 불이 모두 꺼진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거야? 일제히 라이터를 켜고 두리번 거리는데 밖이 소란스럽다. 나와서보니 이쪽 블럭의 건물들이 모두 정전이 된 모양이다.
마마는 얼른 양초를 꺼내서 테이블에 놓아준다. 아니 이게 웬 난리야 싶었는데 양초를 켜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또다른 재미가 생긴 것이다. 테이블마다 양초를 놓고 있자니 웬지 분위기도 좋아지고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말이지, 이럴 때 무서운 이야기를 하곤 해."
"그래? 일본도 마찬가지야."
"근데 이런 속담도 있어.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 정말 귀신을 부른다고."

으흐흐... 좋은 분위기다. 다카도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귀신얘기에 빠져든다. 이런저런 얘길 재밌게 하다가 <음양사>가 생각났다.

"왜 있잖아. 실제로도 있는 건데... 영화도 있고 만화도 있고 소설도 있고..."

설명하다가 돌고래가 한문을 쓰니 그제서야 안다. 역시 한자문화권은 편하다. 니코가 궁금해 하길래 설명을 해줬더니 잘 이해를 못한다.

"그러니까, 귀신을 부를 수 있고, 귀신을 퇴치할 수도 있고..."

아씨, 영어로 음양사가 대체 뭐냔 말이야. 한참 설명을 하는데 니코가

"엑소시스트?"

한다. 예스!! 그거야!!!
조금 다른 개념인가 싶지만 설명하기엔 가장 쉽지 뭐. 역시 박식한 니코는 다른 대륙의 샤먼들에 대해 또다시 재미난 이야기를 해준다. 초특급 박식함이다.

"만물상! 만물상!"
"다카, 왜?"
"마마네 딸 말이야. 둘째딸. 왔어."
"아!"

다카가 정말 너무너무 귀엽다고 했던 마마의 둘째딸이 왔다. 아까 물어보니 할머니댁에 갔다고 해서 엄청 아쉬웠는데 밤이 늦어질 때까지 있었더니 결국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이름은 츠링. 발음이 쬐금 어렵다. 4살배기 츠링은 볼도 바알갛고 통통한 것이 아주아주아주 귀엽다. 정말 귀엽다.

"너무너무 귀여워...T^T"

마마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모두 모여서 이곳저곳에 걸터앉았다. 외할머니, 고모, 마마, 마마 막내동생, 츠링까지 한가족이 모여있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다. 특히 외할머니와 고모는 엄밀히 말하면 사돈지간일텐데 어찌나 정겨운지.

아직도 정전이다. 촛불을 켜놓고 이렇게 둘러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사진도 찍고 하고 있으니 정말 제대로 추억이 쌓이는 느낌이다. 츠링은 사진 찍는 걸 하도 부끄러워해서 당최 얼굴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외국인인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던 옆테이블의 처자들과도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오늘 저녁에 펜톡으로 안왔음 후회할 뻔 했다.



예전에 여행을 다녔을 때는 '이 도시에 있는 건 모조리 보고 가겠어!'라는 마음으로 돌아다녔었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그날 돌아다닐 곳을 체크하고, 하루종일 다리품을 팔며 돌아다녔다. 유명하다고 한 곳은 모조리 가야된다고 생각했고 가서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와야 남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근데 여행을 다녀보니 그렇게 다니면 다닐 수록 재미가 없었다. 기억나는 사람도, 재밌는 얘깃거리도 없고 그저 누구나 갈 수 있는 장소에 가서 구경한 것이 전부였다. 맘에 내키면 가고 여기가 좋으면 남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듯 여행을 하니 이제야 여행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