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고 싶은 가고시마
주변의 모두가 기함할 정도의 양과 강도로 노동하던 곳을 때려치우고 가장 많이 듣게 된 말은 역시 여행을 가라는 것이었다. 이때 아니면 언제 시간 나겠느냐, 가서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오면 좋지 않겠느냐, 이제 좀 노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그간의 나의 삶을 지켜본 대다수가 떠남을 제의했다.
하지만 완전히 번아웃된 나는 만사가 귀찮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퇴사 전에도 여행에 대한 의지는 없었다. 내가 여행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환장하는지 아는 오래 된 지인들은 놀랄 것이다. 가고 싶은 저 먼 어느 곳을 상상하며 마음을 달래고 힘을 얻는 것이 습성과도 같았던 내게, 여행기피는 내 상태를 알려주는 적신호로 보였다.
어쨌든. 마음먹고 훌쩍이라는 게 말이 쉽지 집 떠나면 고생은 기본 장착이고, 워낙 출장이 많은 삶을 살았더니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의욕도 전혀 없고 해서 한동안 집밖에도 잘 안 나가는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백수생활이 두 달째에 접어들면서 뭔가 새로운 곳을 보고 싶다는 의욕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격렬한 여행은 엄두가 안 나지만 이질적인 풍경에 던져져 머리를 식히고 싶다는 생각 정도.
처음에 알아본 건 여행사 상품이었다. 내 인생에 스스로 여행사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미약하나마 여행 의지가 생기긴 했으나 여전히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준비할 마음은 없었던 내게 필요한 현대 문명이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자유여행에 기본 어레인지만 해주는 상품 중(완전한 패키지는 역시 불가능했다) 줄곧 노렸던 중동은 모객이 영 되질 않았고 아프리카 종단은 예방접종이다 뭐다 귀찮아서 당기질 않았다. 나머지 아시아 국가는 너무 익숙해서 고려도 안했고 남미는 그 비행시간을 견디고 싶지 않았고.
그러다 떠올린 곳이 야쿠시마였다. 야쿠시마가 유명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겐 오직 <원령공주>. 일본대중문화개방이 완벽하지 않았던 시절에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당시 유행하던 국제친선협회의 펜팔을 통해 알게 된 일본아이가 보내 준 OST를 닳도록 들으며 언젠가는 저 곳에 가봐야지 꿈꾸던 곳 중 하나였다.
그렇게 목적지를 정하고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반쯤 지친 상태였다. 그래. 여행 준비는 이렇단 말이다. 사실 이 과정부터가 여행인데 전혀 즐겁지가 않아. 거기다 야쿠시마는 가고시마에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트래킹은 역시 정보수집을 해야... 야쿠시마만 갈 것도 아닌데 등산화와 등산복을 따로 챙기고... 그저 섬에 가서 느긋하게 있고 싶었던 데다 이곳저곳 치료를 받고 있던 병약한 내게서 야쿠시마는 점점 멀어졌다.
최종적으로 내 여행지는 야쿠시마를 가기 위해 들려야 했던 가고시마로 변경되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20여 년 전 종로1가 지하 광고에 ‘가고 싶은 가고시마’라는 문구가 있었다. 뭐야 저 어이없는 센스는, 하며 저렇게 광고하는 걸 보니 패키지 관광객이 엄청나게 가는 곳이구나 싶어 웬만하면 가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랬던 곳에 가게된 건 딱 하나, 검색하다 우연히 존재를 알게 된 ‘사쿠라지마’ 때문이었다. 페리로 15분이라니, 활화산이라니. 그래 이거야. 준비 안하고 갈 수 있는 섬! 남들은 하루 만에 돌고 나간다는 섬에서의 여유! 드디어 내가 원하던 곳을 찾았다는 느낌이 왔다.
그렇게 3일 뒤 출발하는 항공권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