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04 Tibet

[티벳] 13. 티벳의 실상 그리고 염원

만물상 2008. 6. 6. 19:53



자, 그렇게 꿈에 그리던 라싸에 왔어! 티벳이라고! 짝퉁 티벳탄 도시가 아냐! 라싸야 라싸!

...하며 신나게 시작될 줄 알았는데 며칠째 침대신세. 한겨울에 그렇게 쏘다니다가 결국 제대로 감기에 걸린 것이다. 어찌나 콧물이 나는지 두루마리 휴지를 주머니에 통째로 넣고 다녔다. 그 와중에 난방은 커녕 입김이 나오는 야크호텔 도미토리는 치명적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포탈라 옆의 시장까지 가서 사온 전기장판이 그나마 구실을 하고 있긴 한데, 낯선 땅에서 병에 걸려 빌빌대자니 더욱 삭신이 쑤시는 것 같다.

나나 돌고래나 그렇게 걱정했던 고산병은 없었다. 라싸가 해발 3700미터인데 쏭판의 뚜아저씨 집만 해도 3500미터라고 해서 놀랐던 적이 있다. 라싸까지 고원지대를 육로로 여행하며 왔더니 적응을 한 모양이다. 고산병은 없지만 꺼얼무에서 버스타고 올 때 예상한 대로 몸살감기에 제대로 걸렸다. 냉방버스에서 그렇게 움직여댔으니 안 걸렸으면 이상한 일이다.



사실 시내를 돌아본 첫날, 감기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나는 엄청난 무력감에 빠져들어야 했다. 라싸가 많이 변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각오도 하고 왔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내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그것은 '실망'이 아니라 '안타까움'이었다. 티벳탄지구에서 한족지구까지 수백미터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도로는 차들이 빈번하고 온통 중국 공산품이 넘쳐나며 장족 거지들은 습관적으로 외국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티벳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절이 있었다. 라싸 전체를 내려다보는 포탈라, 라싸를 끌어안고 있는 포탈라. 하늘을 받치고 있다는 하늘고원 티벳에서도 가장 높고 신성한 곳, 그 이름만으로도 아찔한 향이 느껴지는 포탈라다. 그런 포탈라를 처음 봤을 때... 내 가슴은 그저 아득하게 먹먹해져 왔다. 물론 내가 본 것은 예전 자료였고 예전 사진이었지만, 포탈라 앞은 이렇게 아스팔트가 아닌 흙이었고 주변의 작은 집과 건물들을 모두 아우르며 우뚝 서 있었다.

포탈라 자체는 주은래가 지켜준 덕에 옛모습 그대로 였으나 나에게는 일종의 '유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분명 깔끔하고 멋있으나 박물관 유리 안에 얌전히 모셔진 유물 같았던 것이다. 거기다 포탈라 바로 옆에는 화려한 대형 백화점이 자리잡고 있어 포탈라의 의미를 한층 더 퇴색시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가게마다 온통 공산품이다. 대체 저 물건들을 누가 사갈까 싶은 고가의 오디오 셋트와 카셋트 플레이어, 입은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한 서구식 원피스, 철저하게 중국식 음식을 파는 식당. 잘 닦인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그 옛날 달라이라마가, 승려들이, 티벳탄들이 거닐었을 흙길을 떠올리는 이방인의 마음은 더욱 쓸쓸해졌다.



다음 날 역시 감기기운이 심해져 운신이 힘들었다. 억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노블링카를 보려고 했지만 호텔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이참에 인터넷이나 하자 싶어 야크호텔 피씨방에 들렸다. 한참 서로 볼일을 보다가 나가려는데 돌고래가 쿡 찌른다.

"저거 한글 아냐?"

응? 하고 보니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그녀가 자판으로 치고 있는 글자가 한글이다. 너무 반갑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한국인인 것이다. 아무리 비수기라고 해도 다들 어디 틀어박혔는지 보이지도 않는 마당에 제일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다.

"저기... 혹시 한국인이세요?"



그렇게 알게 된 이종옥씨. 티벳대학에서 티벳어를 배우고 있는 늦깎이 대학생이다. 고향이 경주라는데 나이는 적어도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보인다. 겉모습이 너무 수수해서 한국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종옥씨는 중국인들도 자길 외국인으로 안 본다며 쑥쓰럽게 웃었다. 사실 경주출생이라고는 하는데 말투가 이북말씨라서 돌고래와 나는 지금까지도 이종옥씨가 북에서 온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종옥씨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들을 수가 있었다. 사실 중국어를 조금 하긴 하지만 속내 얘기가 완전히 통할 정도로 하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티벳어는 전혀 못하기 때문에 티벳탄들의 실상이 궁금하던 차였다. 이종옥씨에 따르면 자신이 처음 티벳에 정착한 2년 전까지만 해도 차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눈뜨면 매일매일 달라진다는 말을 라싸에서 절감할 수 있다며, 당장 우리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매주 거리가 달라졌다고 했다.

"포탈라 앞에도 지금은 티벳문양같은 걸 그려서 뭔가 있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무지막지하게 페인트칠하고 길닦고 했다가 관광객들 생각해서 그 위에 덧그린거예요."
"한국에서도 라싸의 변화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보니까 오는 길도 굉장히 빨라졌던데."
"내년 봄이던가, 여하튼 내년엔 기차가 들어온다고 하대요. 기찻길 완공되면 중국인들도 훨씬 많이 들어올 거고 그때는 변화가 더 빨라지겠지요."

한참 얘기하다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근데... 보통 티벳에 오면 영화나 책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달라이 라마에 대한 환상이 크잖아요. 지난 역사도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 지금 티벳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달라이라마나 정치문제 이런 것에 대해서요."
"그게 말입니다... 대학에도 티벳인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티벳사람들, 그런 것에 대해 속내얘기 안합니다. 만약 대학에서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학생이 있다면 당장 퇴학이나 뭐 이런 조치가 내려진단 말입니다. 중국정부가 티벳사람들 사이에도 사람을 심어놨어요. 그래서 서로서로 혹시 이 사람이 아닐까, 이 사람이 내 얘기를 공안한테 전하지 않을까 의심하기 때문에 속내얘기를 안하지요. 아주 절친한 친구나 가족끼리도 거의 안합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이야기를 안하고, 쉬쉬하고, 그러다보면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르게되고, 그렇게 잊혀지고... 그렇게 되겠죠."

티벳여행을 준비하면서 여동완씨의 <티벳속으로>를 봤는데 이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린티벳탄'이라고 해서 중국정부가 심어놓은, 우리로 따지자면 친일파와 같은 존재다. 다만 이 책이 나온 것은 90년대 말이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참고만 하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졌어도 실상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건 훨씬 뒤의 일이지만 라싸의 한 Bar에서 다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뒤에 나오겠지만 라싸에서 함께 다닌 다카(일본인), 니코(그리스인)와 간단히 맥주를 한잔 하는데 한 현지인 남자가 합석해도 되겠냐는 것이다. 대충 응해줬더니 이 사람이 술에 엄청 취해서는 일본과 그리스에 대해 엄청 아는 척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어머니는 티벳사람인데 중국인들이 모함을 했다는 둥, 죽였다는 둥, 복수할 거라는 둥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이 무례한 행동을 끝내질 않아서 우리 모두 짜증이 났고 결국 다카랑 싸움이 붙었는데 그 일로 다카와 니코도 틀어지게 되었다. 다카는 왜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녀석을 쫓아내지 않고 자신이 화를 내는데도 같은 편을 들어주지 않았냐고 화를 냈다. 반면 니코는 무례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 사람이 혹시 공안의 끄나풀이면 어떡할 것이냐, 보통 일반적으로 현지 티벳탄들은 외국인이 많이 오는 Bar에 오지도 않으며 아무리 술에 취해도 처음부터 부모가 죽임을 당했다는 둥 하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외국인이고 자칫하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역시 연장자여서 그런지 니코는 좀 더 이성적인 판단을 했던 모양인데 아무튼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경각심을 늦추지 말고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종옥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추구하는 것도 삶의 방식도 다를지 몰라도 티벳에 대해서 만큼은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한족과 장족을 거의 구분할 수 있다며 '장족은 웬지 더 푸근하고 착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억지 논리를 펴는 이종옥씨. 배시시 웃으면서 티벳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티벳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말이라는 것을 잃어버리면 문화를 잃은 것과 같거든요."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티벳어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이종옥씨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언젠가는, 아니 솔직히 나조차도 비관적인 미래를 예견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언젠가 티벳탄들이 다시 자신들의 땅에서 '시짱자치구'가 아닌 '티벳'을 일구어 나갈 것을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