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04 Tibet

[티벳] 12. 라싸에 도착하다

만물상 2008. 6. 6. 19:50



뭐야 이것들은!!!! 순식간에 우릴 둘러 싼다. 이, 이봐요들, 우린 가진 것 없어요!!

"go to Lhasa?"
"......응-_-?"

오전 10시 반경. 꺼얼무 역이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순식간에 열댓명정도 되는 회족남자들이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더니 와글와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이 삐끼들 능력도 좋네. 이렇게 플랫폼에 들어와도 되는 거야? 그래도 나와 돌고래가 외국인으로 보이긴 했나 보군.

링링, 수분이와 기념사진을 찍은 뒤(삐끼들이 찍어줬다) 앞, 뒤, 옆으로 주렁주렁 매달고 역을 나섰다. 계속 옆에서 말을 걸길래 본격적으로 들어보니 오늘 버스가 출발하는데 한 사람당 600위안이랜다. 누굴 속이려고? 내 친구가 얼마 전에 왔었는데 350위안에 갔다고 말해주니(물론 뻥. 이런 곳에 올 친구는 돌고래밖에 없고 그 돌고래는 지금 내 옆에 있다) 슬슬 값을 내리긴 하는데 아직 택도 없다.



우리는 꺼얼무에서 하루 묵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17시간을 온 터라 엄청 지친 상태였는데 또다시 버스를 탈 순 없었던 것이다. 계속 꼬드기는 삐끼들에게 단호하게 오늘 가지 않겠다고 말하니 이젠 숙소를 잡아준다. 뭐 원래 가려고 했던 삔관이라 나쁘진 않은데 원 왜 이렇게 친절한거야.

짐을 대충 내려놓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일단 버스를 보고 결정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버스정류장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외국인은 한명도 없다.

"바로 이 버스야, 아가씨들. 이거 번호판 보이지? 라싸차라구(우리 번호판에 서울, 부산이 표시되어 있듯 라싸의 싸薩가 써있다). 차 옆에도 시짱자치구 차라고 되어 있잖아. 공안한테 걸려도 전혀 문제 없어."
"차 안에 난방은 돼요?"
"그럼그럼. 차에 올라가서 한번 봐봐."
"내일 아침 8시에 도착하는 건 분명한 거죠?"
"당연하지. 오늘 출발하는 차는 내일 아침에 도착해."
"이 차 안에 보온병 있어요?"
"그럼. 뜨거운 물 마실 수 있어."
물론 이 대화내용은 모두 거짓말이다.-_-

결국 가격 합의를 보고 방을 다시 빼고 정신없이 꺼얼무를 떠났다. 솔직히 몸은 만신창이였고 당장이라도 따뜻한 물에 씻고 싶었지만, 또다시 버스를 타고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얼른 라싸에 가서 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꺼얼무에 도착한지 2시간 만에 바로 라싸행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근데 정말 8시에 도착할까? 지금이 오후 2시인데."
"나도 좀 불안해. 꺼얼무에서 라싸까지 18시간이라니..."

실제로 걸린 시간은 23시간이었다. 물론 중국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지만 그 늘어난 5시간이 얼마나 지옥같았는지는... 생각하기도 싫다.-_- 그래도 23시간이라는 건 길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가는 도중에도 덤프트럭이 연이어 지나가고 엄청나게 큰 공사현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길을 새로 뚫나 싶었는데 티벳대학에서 공부중이라는 한국인을 라싸에서 만나 말을 들어보니 내년경이면 라싸까지 기차가 들어온다고 했다. 이렇게 라싸는 점점 더 중국속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버스는 달린다. 밖으로 보이는 건 황량한 대지와 눈덮인 산들뿐.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걸까? 지도상으로 꺼얼무와 라싸는 꽤 멀어 보이는데. 눈대중으로 짐작해봤자 될리가 없다. 침대버스라 누운 상태에서 매서운 바람이 틈새로 들어오니 피할 수가 없다. 이불을 창문틈에 틀어막고 어깨로 고정시키면서 누웠다.

오후 4시쯤 잠시 차가 서는데 운전사가 밥먹으란다. 정말 허허벌판에 식당하나가 서있다. 란저우에서 사온 소중한 신라면을 먹는데 그 뜨겁고 매운 맛. 바로 이거야! 계속 차를 타야 하니 걱정이 되긴 하지만 기차에서 내려 바로 타는 바람에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먹어서 배가 너무 고팠다.

허겁지겁 먹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그나마 여기엔 식당이 있어서 벌판에 벽돌을 쌓아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봤자 벽돌은 허리춤까지 밖에 안오고 사이 사이로 바람이 슝슝 들어오며 밑을 보면... 말할 것도 없지만. 남자들은 아무데서나 바지를 깐다.

그래도 이게 라싸에 갈 때까지 인류의 손길이 닿은 마지막 화장실이었다. 그 뒤론 그냥 허허벌판에서 엉덩이를 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너무 춥지만 마려운 것을 참고 버스에 누워 있는 건 그야말로 말그대로 지옥이거든...-_-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6시 정도 되었다. 아, 아직도 14시간 남았나. 허리가 너무 아프군.



어슴푸레 눈이 떠진다... 지금 몇 시? 7시 반? 이런 젠장. 다시 자야겠다.



씨발, 욕창 생기겠다!! 어이구 등짝이야... 뭐야, 8시? 또 자야돼?



너무 춥다... 역시 난방이 된다는 말은 거짓이었군... 아아 괴로워... 아직도 9시밖에 안됐어...



아, 정말 너무 괴롭다. 이제 해가 져서 밖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아직도 시간은 너무나 많이 남았고 무엇보다... 너무 추워!!!!!! 진짜 환장하게 춥다. 나는 아래위로 산악용 바지와 점퍼를 입었고 속에는 폴라티와 산악용 상의를 겹겹이 입었으며 그 안에는 내복을 두겹씩 입었고 양말 역시 두꺼운 산악용으로 두개 신었다. 그런데도 춥다. 침낭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으면 몸통 부분은 그나마 나은데 얼굴은 칼바람이 내리치듯 공기가 차다.

그렇다고 얼굴을 덮고 있을 순 없다. 사실 나는 폐소공포증이 약간 있다. 어렸을 때 딱히 갇혀서 고생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다. 그래서 쏭판에서 트래킹 할 때도 밖에서 텐트에 자크를 채우는 순간 불안해서 어쩔줄을 모르다가 돌고래와 자리를 바꿔서 텐트를 열었었다. 내가 트래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폐소공포증을 이기고 내 한계를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또다시 도진건지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위에 있는 침대가 상당히 낮게 달려 있는데다 침대도 작은 편이고, 그 상태에서 침낭안에 있어야 하니 정말 심장이 답답한듯 느껴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가만히 누워 있으면 온기가 유지될 수도 있겠는데 계속 몸을 움직이고 숨을 크게 내쉬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니 그럴 수가 없다.

거기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누워있는 일 뿐. 밤도 아니고 멀쩡하게 돌아다닐 낮시간을 주구장창 누워있었으니 허리가 배길만도 하다. 억지로 누워있는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처음 알았다. 물론 퍼질러 자다가 일어날 때 허리가 아픈 적은 있었는데 이렇게 괴로운 적은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는... 여기는... 라싸로 가는 길! 해발 몇천이 되는지 모른다!!! 고산병이 끊임없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괜히 숨이 가빠오는 것 같기도 하고 당최 폐소공포증 때문인지 고산증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급히 출발하느라 홍경천이고 뭐고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은 더 커진다.

거기다가... 이 사람들 왜 이래? 다 장족 아닌가? 번갈아 운전하는 운전수 두 명은 한족이고 버스 안에는 장족들로 가득 찼는데 갈수록 호흡소리가 거칠어진다.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버스 안. 엔진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숨쉬는 소리가 너무 생생하게 들린다. 고도가 높아지긴 했는지 허억허억, 끄응끄응, 하악하악, 아주 골고루다. 아무것도 안보이는 상황에서 괴로워하는 소리들이 귓속을 파고드니 더더욱 불안해진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괴로울 뿐이야.



끼익---!

버스가 선다. 밤 11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대지 한 가운데 주유소가 있다. 어두운 버스 안에서 폐소공포증과, 추위와, 욕창이 생길듯한 등과, 혹시 걸렸을지 모를 고산병과 싸우고 있던 나는 미친듯이 뛰쳐나갔다. 후아후아. 그나마 숨이 조금 쉬어진다.
앗... 화장실에 가고 싶다.=_=

버스 옆에서 그냥 바지를 깠다. 이젠 얼굴에 철판이 아니라 특수소재 합금으로 못질까지 땅땅 해버렸다. 볼일을 보고 일어서면서 바지를 올리는데.

"어어어어어어-------!!!!!!!!!!!!!!"

씨버럴!!!! 저거이 내 돈!!!!!!!!!
대체 허리춤의 복대가 어떻게 되어 있었던 건지 툭 하고 떨어진다. 그러더니 앗차 할 새도 없이 그 안의 돈들이 슝슝 빠져나간다. 자크가 열려 있었나...생각할 새가 없어!! 잡아야 돼!!!

"안돼에에에~~!!!!!!!!!!!!"

쓸 돈만 빼둔 상황이라 그 안에는 달러와 100원짜리 인민폐들 뿐. 무거운 여권은 가만히 있는데 이 돈들이 한겨울의 고산바람에 춤을 추며 날아가는 것이다. 진짜 안된다. 바지를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대충 추스려서 한 손으로 움켜쥔 뒤 돈을 따라 춤을 췄다.-_-

결국 다 주웠다. 헉헉 인간 승리야. 인간 승리. 자크도 못채운 바지와 엉망이 된 돈뭉치를 움켜쥐고 버스에 올랐다. 내 침대가 제일 앞에 있기 때문에 일어서서 바지를 추스릴 수가 없다. 결국 누운 상태에서 허리를 들썩이며 바지를 제대로 입었다. 어이구 이게 무슨 꼴이래...

그런 와중에 돌고래를 보니(침대가 세 줄로 되어 있는데 돌고래는 맞은 편 창가쪽이다) 정말 이상하다. 돌고래는 아까 신라면을 먹은 뒤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침낭을 덮고 담요를 베고 이불로 싸고 그야말로 누에고치처럼 얼굴까지 칭칭 감싼 채 일어나질 않는다. 키가 작긴 하지만 이 침대는 돌고래한테도 맞는 사이즈가 아닐텐데. 허리는 안 배기나? 조금의 미동도 없다. 혹시 라싸가 아니라 천국행 버스를 탄건 아닌가? -_-
그리고, 다시 누웠다.



으으... 허리야. 이젠 이쪽으로 누워야겠어. 뭐야, 새벽 1시? 그래도 7시간 남았다.



감기 된통 걸리겠구만. 신호가 온다고. 아직 2시도 안됐어... 언제쯤 닿으려나.



응? 뭐하는 겨?
새벽 3시쯤 또 일어나니(말그대로 하루종일 자는 것이니 조금만 소리가 나도 깼다가 다시 억지로 잠드는 걸 반복했다) 갑자기 운전사가 시동을 끈다. 아, 아니 이봐! 히터를 트는 건 꿈도 안꾸지만 그래도 시동을 끄다니? 전력질주를 해야 할 이때에 무슨 짓이야? 이봐! 가자구!

아니 이사람들 두명이서 번갈아 운전을 하고 운전을 안할 땐 계속 자더니, 어째서 둘이 한꺼번에 자는 건가? 모든 걸 끄고 본격적으로 누워 버린다. 아아악!!! 환장하겠다. 아침 8시에 도착할지 안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는 시간에 달린다면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앞으로 5시간인데! 제발 얼른 달려줘!!!!



그리고 두시간이 지났다...=_=



꽝꽝꽝 두드리는 소리에 운전수들이 깨기 시작한다. 다른 버스 운전사가 깨우는 것이다. 이보쇼들, 벌써 두시간이 지났어. 얼른 시동 못걸어?
그리고 잠깐 스치는 생각. 이상하다. 처음 말한대로 아침 8시에 도착한다면 지금이 새벽 5시, 앞으로 세시간 남았다. 세시간 밖에 안남았는데 그냥 달리고 말지 두시간을 잤다는 건 이상하잖아? 세시간을 달리기 위해 두시간을 자다니.
(응. 당연히 말이 안되지.-_-)
그리고 또다시 누웠다. 여전히 돌고래는 미동이 없다.



앗... 6시다. 이제 두시간인거야? 에헤헤. 등은 아프지만... 조금만 참자!



오우, 동이텄네. 밖이 훤해지는군. 창에 서리가 얼어서 아무것도 안보여.



이상하네... 7시 50분인데 시가지가 아닌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이야.



일어나 볼까? 아니 뭐 30분 정도는 늦어질 수 있지. 그래도, 라싸잖아.



......젠장!!!! 일어나자!!!



헉.
이런 걸 보고 가슴에 돌덩이가 하나 내려앉았다고 하는 건가.
지금은 아침 9시. 한시간을 오바한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어째서 아직도 밖이 허허벌판 눈밭인거야!!!!!!!!!!!

그럼 그렇지... 라싸가 어딘데 18시간이겠어. 옆창문으론 바람이 새어들어올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앞유리창으로 풍경이 들어온다.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받아 눈이 시리게 하얀 산, 구불구불 산길을 타는 도로, 그리고 티벳어로 된 표지판. 가까이 오긴 한 모양인데 그래도 아직 도시가 보이는 분위기는 아니다.

"엇, 돌고래! 일어났냐?"
"응... 아직 도착 안했네?"
"도착이고 자시고 너 죽은 줄 알았다."

밤새 끙끙거리던 사람들도 버스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한참을 달리니 정말 거짓말처럼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시 외곽에 들어서니 공안의 검문소가 있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둘다 침낭속으로 쑥 들어가버렸다.-_-;

중간중간 공안검문소를 거쳤는데 그때마다 얼마 조마조마 했는지 모른다. 물론 운전수들도 걸리면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우릴 태운 것 만으로도 믿는 구석이 있겠거니 했지만 혹시 또 모르니까. 트집잡히면 그냥 그대로 당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우습지도 않은 여행허가증을 끊을 수는 없다.



공안의 검색도 무사히 지나치고 그야말로 버스는 신나게 달린다. 복잡한 시가지는 아니지만 장거리 버스니까 라싸 외곽에 세워 줄 것이다. 정말, 온 건가? 진짜 라싸야? 벌써 엉덩이가 들썩인다. 제발 빨리 좀 가라.

"라싸예요!"
"라싸? 여기서 내려요?"
"그럼요, 도착했어요!"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돈을 마저 지불하고, 그리고 발을 디뎠다.
상상 속에서처럼 하늘은 눈이 시리게 푸르고 눈덮힌 산자락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였던 고산병은 결국 없었다.
야크버터 냄새, 사원의 향기, 유목민, 티벳불교의 경전읽는 소리, 티벳탄들의 인심...
모든 것을 함축하는 향기를 지니고 있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바로 그 '라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