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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2. 에페스를 다녀오는 조금 이상한 방법 下

만물상 2013. 9. 6. 22:07

에페스는 참으로 볼만한 곳이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관광객, 관광객, 관광객. 그 무리에 일조한 주제에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머릿속엔 그저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셀축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하는 의문뿐이었다(에페스에 오는 관광객은 다들 셀축에 묵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으므로). 여튼 셀축에 도착한 이후 처음 보는 거대 인파였다. 


볼륨 높인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각양각색의 무리들을 요리조리 비껴가며 에페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메멧이 준 한국어 책자는 꽤 유용했다. 안내판의 영어 설명을 다 알아먹는 것도 아니고. 가끔 이어폰을 빼고 무리에 끼어 들어 가이드 설명을 낼름 주워먹거나, 이러다 풍경 사진만 남겠다는 생각에 내 사진을 부탁하거나 그랬다. 


하지만 사실 에페스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세트장 같은 낡은 고대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 그 자체였다. 







이런 걸 언덕이라고 하는 건가. 알 수 없는 갖가지 나무와 꽃, 풀밭이 덮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은 내가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저 예뻤다. 지중해, 로마, 뭐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영화에서 보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초록 계열의 색이란 색은 다 모인 가운데 중간 중간 노랑색 들꽃과 보랏빛 꽃나무, 빨간 양귀비들이 물결쳤다. 봄이라기엔 아늑하고 가을이라기엔 따뜻한 미묘한 감각. 동쪽 끝에서 날아온 관광객에겐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꽤 길었던 에페스 감상을 마치고 출입구로 나왔을 때 내 몸은 만신창이였다. 특별히 고돼서가 아니라 날씨, 아니 내 옷 때문이었다. 서울과 비슷하게 썰렁한 이스탄불의 날씨만 생각하고 챙겨온 옷들은 태양이 작열하는 남쪽 셀축에 맞지 않았다. 하필 유적지 탐방이라고 니트에 긴 청바지에 운동화까지 신은 내 몸은 올라오는 열기로 가득찼고, 쓰러지기 전에 시원한 옷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늘어선 각종 상점을 기웃거리다 모자 파는 아저씨와 몇 마디 노닥거리는데(대체 무슨 얘길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붙이기에 재미들렸던 것 같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 분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아저씨는 한국어로 모자! 모자! 외치며 호객을 시작했고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왔다.


한국 아저씨: “하우 머치 이즈 디스?”

터키 아저씨: “투웬티. 싸다 싸다”


모국어를 전혀 안 쓰는 두 사람. 이윽고 비싸다 싸다 흥정에 들어간다. 슬쩍 보니 모자 상태치고 비싼데..


“좀 비싸긴 하네요.”

“한국 아가씨네! 그래요? 아가씨 보기엔 얼마면 되겠어요?”

“아마 시내 시장에선 훨씬 쌀텐데.. 뭐 관광지 코앞이라 비쌀 거예요.”

“익스펜시브! 다운 다운!”


이러고 있는데 순간 정말 헉 했다. 아이고 아저씨...... 그냥 말로 하면 될 걸, 왜 굳이 눈으로 확인시켜 주시나. 영어도 재깍 하시는구만. 깎고 싶은 가격을 말하면 되지 왜 지갑을 활짝 열어 그만큼의 돈을 꺼내서 보여주시냐고!! 


“노! 투웬티!”

“그럼 나인틴? 에이틴?”

“투웬티! 디스 이즈 베리 굿.”

“거참. 끝까지 안된다네.”


당연히 안되죠! 방금 지갑에 빵빵하게 가득 찬 돈뭉치 보여주셨잖아요! 


아버지 뻘이라 깎는 거 도와드릴까 했는데 뭐 돈도 많으시고, 이미 미어터지는 지갑을 본 가게 아저씨도 깎아줄 심산이 아니다. 결국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고 한국 아저씨가 사라지자 가게 아저씨는 신이 났다. 나와 한국 아저씨의 대화를 다르게 이해했는지 자기랑 여기서 장사하잖다. 한국 손님 많이 오는데 한국인 점원이 있으면 돈을 엄청 벌 수 있겠단다. 그냥 깔깔거리다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슬슬 본래 목적으로 돌아와 옷을 둘러봤다. 뭐 기나긴 쇼핑 얘기는 필요없고,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맥시 원피스로 샀다. 사실 가격대가 좀 있었는데(한국 인터넷 쇼핑몰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다른 집과 비교해 퀄리티가 월등히 높았다. 속치마도 제대로 있고 바느질도 잘 됐고, 나중에 빨아보니 물빠짐도 전혀 없고. 


어쨌든 옷까지 사고 나니 드는 생각은... 아무래도 메멧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여긴 개별여행자들이 없나? 대형 관광버스들만 늘어서 있고 딱히 셀축 시내까지 타고 갈 수단이 보이질 않는다. 근데 로밍해 온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로밍 안내문까지 꺼내들고 이리 저리 눌러보는데 터키 현지로 발신자체가 안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옷 한 벌 샀으니 전화 정도 쓰게 해주겠지 싶어 옷가게로 돌아갔다. 


“저, 죄송한데 전화 한 통만 쓰고 싶은데요. 제 전화기가 되질 않아서.”

“전화를 쓴다구요?”


매우 놀라며, 조금 불편해하며, 선뜻 대답을 안 하는 주인 아줌마를 보며 왜 저러지? 하다가 아하, 하고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를 보여주며 덧붙였다.


“외국으로 전화하는 거 아니에요. 셀축에 하는 거예요.”


그러자 웃으면서 전화기를 내준다. 역시나. 

대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바로 전화받은 메멧은 당장 오겠다고 한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지만 일단 살았다 싶다. 대충 위치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고는 가게 앞에서 메멧을 기다렸다.



“......?”

“헬로우. 아까부터 당신을 보고 있었어요.”


그래 안다. 아까부터 힐끗 힐끗 보고 있었던 거. 

메멧을 기다리며 가게 앞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더니 의도가 뻔한 눈빛으로 계속 눈을 마주쳐오던 녀석이 말을 건다. 하칸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녀석의 질문은 뻔했다. 어디서 왔냐, 언제 왔냐, 어딜 가봤냐, 뭐가 좋았냐.. 알고 보니 포쓰 강한 옷가게 주인아줌마의 아들. 내 눈에야 30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물론 훨씬 어리겠지.


“쉬린제 가봤어요?”

“쉬린제..? 아,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아직 안 가봤어요.”

“난 쉬린제에 살아요. 내가 안내해 줄 수 있는데.”


한참을 쉬린제의 아름다움과 한국 여자의 아름다움(......)과 뭐 이것 저것 떠들어대는데 난 오지 않는 메멧에게 텔레파시를 보낼 뿐이다. 느긋한 터키사람들 습성이야 익숙해졌지만, 이럴 땐 좀 빨리 와주면 안되냐고!

저쪽에서 지 엄마가 뭐라 뭐라 터키말로 얘기하자 막 웃으며 그런다.


“엄마가 그러는데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졌대요.”


저쪽에서 아줌마가 영어로 “내 아들이 처음부터 당신을 좋아했어!” 하고 외친다. 아니 이 웃기는 모자를 보게. 이게 글로 쓰니까 뭐 순진한 청년 하나가 외국인 여자한테 빠진 로맨틱한 상황으로 보이는데 그게 절대 아니다. 내가 스무살 꽃띠도 아니고 꼬셔서 한번 어찌 해보려는 거랑 좋아하는 거랑 구분도 못하겠나. 추파를 던지며 길거리 헌팅 중인 아들을 거들고 있으니 기가 막힌 거다. 


쉬린제는 안 갈 수도 있다고,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다. 내 친구가 지금 오는 중이라고 했더니 ‘터키 가이’냐고 묻는데, 맞다고 했더니, 오마이갓. 오히려 음흉하게 웃으며 좋아한다. ‘오늘 쟤랑 놀고 나중에 나랑 놀면 되겠네’ 이 분위기다. 그리곤 얼른 자기 이름과 번호를 휘갈겨 쓴 종이를 준다.


진짜 이런 얘기 쓰긴 싫은데, 물론 일부겠지만, 도대체 여기 온 여자 여행자들이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익숙하게 꼬셔대나 싶었다(당연히 한국인에 한정해서 말하는 건 아니다). 동양 여자 관심 보이고 꼬시는 거야 이스탄불부터 익숙했고, 그게 아니라 바로 위에 쓴 저 부분. 난 친구가 터키 가이냐는 질문을 듣자마자 일단 프렌드->터키 가이로 진행되는 녀석의 머릿속 구조가 어이없었고, 맞다고 하면 ‘아 얘는 남자가 있구나’ 하고 아쉬워하거나 ‘이미 터키 남자를 만나는구나’ 하고 당황하거나, 결과적으로 떨어져 나가겠구나 했다. 근데 이건 마치... 야, 너 터키 여자들한테도 이럴 수 있냐?


그 와중에 메멧이 무사히 고친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했다. 어찌나 반가운지. 날 발견하고 부릉부릉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는데, 오토바이 시동을 끄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게 냉큼 뒤에 올라탔다. 그런 날 보는 하칸의 눈빛이... 딱 뒤통수 한 대 치고 싶다. 


나중에 돌아와서 메멧에게 얘길하니 쉬린제는 절대 혼자 가면 안 된단다. 이유를 물으니 심각한 표정으로 “하시시, 하시시” 한다. 속으로 하칸의 능글맞은 얼굴과 하시시가 매우 어울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쉬린제에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나 일말의 불신을 품는, 이미 순수하지 못한 나로선 메멧이 하시시 때문에 말리는지 하칸 때문에 말리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렇게, 수백년짜리 유적지보다 진득한 기억들을 남긴 이상한 에페스 관광은 끝이 났고, 동시에 나의 모든 관광 일정도 끝났다. 셀축으로 돌아온 난 메멧의 레스토랑에 둥지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