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mad/'11 Turkey

[터키] 11. 에페스를 다녀오는 조금 이상한 방법 中

만물상 2013. 8. 16. 22:35

메멧이 묻는다.

 

“불법으로 할래요, 합법으로 할래요?”

 

뜬금없이 이건 또 무슨 말이래.
설명을 들어보니 어릴 때부터 에페스를 놀이터처럼 드나든 탓에 소위 개구멍을 안다는 거다. 좀 돌아가긴 하지만 무료로 에페스를 볼 수 있다고. 입장료야 비싸 봤자 얼마 하겠나 싶었고 그보다 왠지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아 불법을 선택했다. 다만 그저 에페스 구경하겠다고 나선 길이 점점 모험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에 슬쩍 불안하긴 했다.

 

해가 올라가면서 더워졌지만 길은 여전히 좋았다. 별로 기억은 안나지만 각자 본인 얘기도 좀 하고 중간 중간 메멧이 이건 무슨 밭, 저건 무슨 나무 하면서 알려주기도 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걸맞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던 듯 하다. 어쩌다보니 메멧이 내 개인 가이드처럼 되어버려 신경쓰이긴 했지만 뭐 지가 여기까지 온 걸 어쩌라고.

 

이것이 무려 코튼밭이다. 태어나서 처음 봤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다가 좀 트인 곳으로 나오니 정비가 된 또다른 길이 보인다. 길을 따라 이어진 철조망을 보자마자 ‘불법’이라는 두 글자가 내 머릿속을 휘감는다. 이제 시작인 것인가... 더 걷다 보니 철문이 길을 가로막는다. 철문 너머로 이어진 풀숲이 눈에 들어온다.

 

“길이 막혔는데요?”

“넘어가면 되요. 쉬워요.”

 

얘 뭐래냐? 하는 순간 웃차! 하고 철문 위로 올라가는 메멧. 창살을 붙잡고 발을 디디며 올라가 훌쩍 뛰어 버린다. 그래서... 어쩌라고?

 

“가방 주고 넘어 와요.”

 

......젠장할. 역시 뒷구멍은 편한 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 이렇게 다리 번쩍 올려가며 담을 넘은 적이 있던가. 메멧 말대로 쉽긴 쉬웠다만, 순간 나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담배 꼬나물고 문을 넘는 메멧

 

철문을 넘어 본격적인 숲길로 접어들었다. 사실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홀로 여행하는 여자로서 말이다. 메멧과 오래 봐 온 사이도 아니고, 에페스로 안내하는지 어디 팔아먹으려고 데려가는지(별로 쓸 데는 없지만) 알 길이 없다. 그 와중에 길은 점점 외진 곳으로 접어 들고 있었고. 여기서 죽어 나자빠진들 몇 달이 지나도 발견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갔던 건 물론 사람을 판단하는 내 눈을 믿은 것(그러니까 메멧을 어느 정도 신뢰한 것)도 있었지만 실은..

 

...이 친구 덩치가 좀 작아서 말이다.

 

혹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왠지 내가 이길 것 같은 기분 좋지 않은 승리감(...)이 깔려 있어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따라 나섰던 것이다. 가방으로 후려치고 카메라로 머리를 내려 찍...는 일이 발생하면 안되겠지만 여차하면, 하고 속으로 이런 저런 폭력적인 구상을 했던 게 사실이었다. 평화로운 경치와 전혀 안 어울리기도 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때의 상상이 참말로 미안했지만,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내가 이런 어두컴컴한 생각을 하며 따라가는 동안에도 메멧은 발에 걸리는 덤불을 치워주고 얼굴에 닿는 나뭇가지를 제거해주며 열심히 나아가고 있었다.

 

 

“이거 봐요!”

 

갑자기 멈춘 메멧이 가리키는 걸 보니 세상에, 그냥 돌이 아니다.

 

“여기도 있어요.”

 

둘러 보니 사람의 손을 거친 돌 조각, 쓰러진 기둥, 고대 알파벳이 쓰여 있는 석판... 역사의 흔적이 풀숲 여기 저기에 널려 있다. 에페스 부지와 가까워지긴 한 모양이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딘지도 모를 숲 속에 던져져 있는 유물이 주는 느낌이란, 누구나 올 수 있는 관광지에서 바글바글한 관광객과 함께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발견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 옛날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기분을 0.01% 정도 알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소란스러워진다.

 

“다 왔어요.”

 

분명 풀숲을 헤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에페스 안에 던져지니 신기하다. 눈앞으로 지나가는 다른 관광객들과 다름없이 나도 에페스에 들어와 있다. 메멧이 짚어주는 지점을 보니 두 개의 입구와 멀리 떨어진 에페스 한 가운데다.

 

임무를 마친 메멧은 돌아갈 때도 데리러 오겠다며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어떻게 올 거냐고 했더니 오토바이를 고칠 거란다. 참으로 불안한 답변이로고... 어찌됐든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했다. 결국 난 무사히 에페스에 들어왔고 그는 다시 걸어서 오토바이를 끌고 돌아가야 하니까. 구경 마치면 꼭 전화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번호를 받으면서도 정말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출구로 나가면 뭐든 교통수단이 있을 테니 굳이 신세를 질 필요가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