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3. 너무나도 긴 하루, 첫번째 사기를 당하다
오전 9시 반.
하선한 뒤 눈에 들어오는 첫 풍경은 짙은 색의 제복들. 친절하고 깔끔한 직원이 아니라 공안이다. 정말 중국에 오긴 온 모양이다. 7월의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훅하고 끼치던 후텁지근함 대신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선상비자를 발급받고 여권심사대를 거친 뒤 아저씨가 건네주는 짐과 함께 통과하니 얼른 누가 와서 짐을 받아간다. 돈은 받지 않고 그냥 나왔다. 좋은 방에서 너무 편하게 온 데다가 출국할 때부터 배 안에서까지 계속 우리를 신경 써 주셨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아저씨가 밀어준 짐 옆에서 겨우 3미터를 걸으니 기다리던 사람이 받아갔기 때문에 별로 한 일도 없었다. 우리 표가 있었기에 통과한 짐이기는 하지만.
문을 나서니 정말 중국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중국이다. 열차표를 사야하니 일단 칭따오역까지 가야겠는데 처음부터 막막하다. 사람들이 모두 버스타고 칭따오역으로 가니까 사람들을 따라가라고 들었는데 단 둘이 나와 버린 우리는 전혀 길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가 여행 내내 고집한 '시내버스 이용'을 위해 무작정 걸었다. 일단 터미널을 나선 뒤 오른쪽으로 걸었는데 걷다보니 아닌 것 같아 왼쪽으로 걸었다(진짜 대책없다). 조금만 더 걷다가 안나오면 택시를 타기로 했는데 거짓말처럼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팻말을 살펴보니 217번 버스의 아홉 번째 정류장이 열차역이다.
버스가 왔다. 한사람 당 2위안이랜다. 그때야 순순히 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베이징도 샹하이도 보통시내버스는 1위안이고 좋은 버스가 2위안인데? 하지만 사기였든 아니든 이 아저씨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영화 <미이라>의 에블린 오빠와 똑같이 생긴 이 운전사 아저씨는 손님이 우리 둘밖에 없자 어디로 가냐고 물었는데, 기차역이라고 했더니, 이럴 수가! 말 끝나고 한 3분 만에 기차역에 도착한 것이다. 노선 무시하고 지름길로 달린 거다. 아무리 손님이 우리 뿐이어도 그렇지. 저 앞으로 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일러주시며 잘 가라고 하시는데 너무 어이가 없고 재밌어서 한참을 웃었다.
역에서는 드디어 첫 사고를 쳤다.
중국은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기차역은 잘 되어있다. 엄청 큰 건물인데 두 군데로 나뉘어져서 한 건물은 기차타는 곳이고 나머지는 매표소다. 기차타는 건물은 매우 엄격해서 들어갈 때 큰 짐은 검사대를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큰 건물임에도 열린 문은 하나뿐이다. 난징같은 곳은 더 엄격해서, 입구의 전광판에 뜨는 열차번호에 해당하는 사람만이 표를 보여주고 통과할 수 있다. 이유는 하나,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매표소를 찾기 위해 기차역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왠 조그만 유원지매표소 같은 건물이 바로 보이길래 거기로 갔다. 사람들이 창구앞에 매달려서 표를 사는데 우리는 얼른 원하는 걸 적은 종이를 내보였다. 기차번호와 좌석종류, 날짜, 시간, 수량, 목적지를 적은 종이다. 바로 답변이 돌아온다. "메이요우(없어요)."
나중에야 여러 번 열차표를 사면서 이력이 난 일이고 '없으면 이렇게 하지 뭐'라는 식의 여유도 있었지만, 이땐 정말 당황했다. 오늘 열차를 타고 옌저우에 가서 버스타고 취푸까지 가야하는데, 어쩌나? 칭따오에서 자야하나? 표는 어떻게 사나?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나? 우리의 여행은 처음부터 꼬이는 건가!!
둘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어떤 아줌마가 다가온다. 원래 숙소삐끼 아줌만데 표를 못 구한 걸 알자 자기가 구해주겠다고 한다. 암표인가 싶었으나 어쨌든 타야겠다는 생각에 그러마했다. 아줌마는 우릴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니(지금 생각해보면 정식 매표소를 계속 지나쳤다) 다시 조그만 매표소로 돌아왔다. 이래저래 알아보더니 표는 있다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있긴 있는데 어떻다는 거야? 대충 알아들었다고 하고는 사겠다고 했더니 정말 옌저우행 표를 두 장 뽑아온다. 无座라고 써있다. 이거였군. 입석이라는 얘기다. 한 장에 44위안, 둘이서 88위안을 쓰고 수고비로 22위안을 뺏겼다. 시간대도 예상보다 늦었지만 그래도 표가 있는 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와 헤어진 뒤 역 가까이 가보니 뭔가 이상하다. 건물이 엄청 큰데 들어가 보니, 아뿔싸... 창구가 십여 개는 되는 정식 매표소다. 전광판으로 보니 우리 표보다 빠른 시간으로 좌석이 있다. 어쩔까 하다가 취푸까지 가는 버스편도 불투명했으므로 결국 표를 다시 샀다. 1인당 66위안주고.
사실 처음엔 짜증이 엄청 났지만 금세 풀렸다. 버스기사 아저씨같은 분들도 계시니까. 무엇보다 여행에서- 그것도 중국 여행에서 이런 일 한번 없이 조용한 게 이상하지. 여행기들 보면서 그렇게 부러워하던 일이 아니었냐고!
마음을 풀리게 한 건, 8위안 주고 잔뜩 산 빵과 과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차는 시끄럽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의외로 한가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칭따오가 시발점이기 때문이었다. 역을 지나칠 때마다 사람이 꾸역꾸역 몰려들더니 결국 꽉 차고도 입석이 잔뜩이다.
중국열차를 타보면, 아니 열차역 주변만 봐도 알겠지만 대체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걸까, 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일단 보따리들이 크다. 우리 배낭이 작아보일 정도로 각종 캐리어에 푸대자루에 이불보따리까지,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짐들을 이고지고 다닌다. 요일도 시간도 상관없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매순간 이동한다.
그리고 백이면 백 대부분 입석이기 때문에 7시간을 가는 동안 앞자리의 사람이 몇 번이나 바뀐다. 이 입석에 대한 웃긴 얘기는 나중에 샹하이 가는 열차에서 얘기하겠지만, 멀쩡히 앉아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여기 내 자린데요" 하면 열에 아홉 정도는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다(강조하지만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이다).
가까이만 앉으면 금방 가족분위기가 된다. 몇 마디 말을 붙이더니 친해지고, 그 얘기를 듣던 옆 사람이 끼어들고, 같이 카드놀이를 하고, 이러면서 양쪽 열 명 정도가 함께 얘기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남녀노소가 없어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신 웃고 떠들고 한다. 그러다가 내릴 때가 되면 별다른 헤어짐 없이 간단히 인사하고 내린다. 방송으로는 계속 늘어진 테이프를 틀어주고, 사람들은 떠들고, 그 혼잡한 사이를 차장언니가 빗자루로 쓸고 물걸레로 훔치며 지나다닌다.
차장언니는 복도는 물론 화장실 청소도 하고 문도 잠그느라 바쁘다. 열차의 화장실은 변기 밑이 뚫려있어서 내용물이 바로 선로에 떨어지는데, 역 주변 환경정화를 위해 역에 가까워지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역을 떠나면 다시 문을 여는 것이다. 차장언니의 또 다른 중요한 업무는 짐정리인데 우리 지하철처럼 여러 개의 봉으로 되어있는 선반에 올려놓은 짐을 정리하는 것이다. 캐리어는 상관없지만 배낭에서 내려온 가방끈은 꼭 선반위로 쑤셔 넣는다. 아무리 정리해도 사람들이 들고 날 때 마다 흘러내리는데, 그래도 손님들을 일어나게 하면서(때론 손님한테 시키면서) 그 일을 꼭 한다. 알 수 없다.
드디어 옌저주역이랜다. 가방을 메고 내리려는데 뒤에 있던 청년이 옌저우역이냐고 물어본다. 맞다고 했더니 다시 무슨 말을 하는데 못 알아듣고는 "팅뿌똥(못 알아듣겠어요)"했더니 놀란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아까 선반에 있던 한중사전을 봤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열차에서 내리니 8시 반이라 이미 캄캄한 밤이다. 역 앞에서 취푸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지금도 할지 모르겠다. 얼른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저씨들이 택시를 타라고 한다. 숙소삐끼인줄 알고 대충 지나치는데 한 아저씨가 취푸 어쩌구 한다. 얼른 귀가 트여 다가갔더니 홍콩배우 증지위와 똑같이 생겼다. 뭐라고 또 말을 하는데 그야말로 산둥사투리. 이를 어쩌나 싶은데 아까 말 걸었던 청년이 다가오더니 이 사람들 한국 사람들이라며 통역 아닌 통역을 해준다. 학생이라더니 이 청년 발음은 좀 알아듣겠다.
말인즉슨 지금은 취푸까지 가는 버스가 없고 택시를 타야한다는데 이는 청년도 수긍한다. 어쩔까 하다가 방법이 없는 것 같아 타기로 하고 역 앞에 나와 보니 차는 택시용이 아니다. 본업은 아닌 모양이다. 둘이 30위안 달라길래 예상가격과 같아서 얼른 탔다. 가는 와중에 가려는 숙소를 알려줬는데 아저씨가 자기가 아는 싼 숙소에 데려다 주는 게 어떠냐고 한다. 사실 우리도 단순히 가이드북에 나와 있던 걸 부른 거라 에라 그냥 맘대로 가라 했다. 아저씨는 마구 달리며 계속 뭔가를 물어보는데, 더 이상 알아듣는 건 무리라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튼 라디오에서는 DJ.DOC의 노래를 번안한 중국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저씨는 새됐다. 글쎄 찾아간 숙소가 외국인은 안받는 댄다(이거 알아듣기도 무지 힘들었다). 결국 모퉁이 돌아서 바로 나온 숙소로 갔는데 호텔은 아니고 부지규모가 꽤 큰 단층건물이다. 욕실까지 제대로 있는 넓찍한 2인실에 이틀 300위안을 달랜다. 헉... 방이 좋긴 해도 너무 비싼 거 아닌가? 하지만 워낙에 지쳐있는데다 아저씨가 너무 수고하셔서 그냥 자겠다했다. 보아하니 그냥 데려온 거라 커미션도 못 받는 모양인데 끝까지 신경써주는데다- 아까 말했듯 증지위와 너무 닮아서 웬지 친근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도 참 다양하다.
온수는 안나온다. 아저씨나 방보여주는 아가씨나 "중국의 모든 숙소는 온수 안 나와요" 라고 하는데....에휴. 이 시골사람들에게 뭘 더 바라냐 싶었다. 여권을 달라기에 보여줬더니 지난 여름에 받았던 비자를 보질않나, March가 8월이냐고 묻질 않나, 어쩌겠냔 말이다. 다행히 카이슈웨이(중국 모든 숙소나 열차에 있는 차 마시는 뜨거운 물. 보통 큰 보온병에 들어있다)가 보온병이 아닌 정수기 형태여서 그 물을 받아다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난방이 되긴 하는데 참으로 그 힘이 미약하여서 잠바를 입고 침대보를 파고들며 잠들었다. 핫팩을 가져올걸 그랬다. 여행 둘째 날이다.